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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역]김유(2014.9.11.목).남한산성 수어장대 등 4장

 

[출처] 위키백과

김유(金瑬, 1571년 ~ 1648년 3월 5일)는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순천이다. 인조반정의 공신이며 김여물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김여물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이 되었다. 서인의 영수이고, 인조반정을 기여한 공로로 정사1등공신에 책록되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생애[편집]

아버지는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이고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강수(朴岡壽)의 딸, 처는 진주유씨(晋州柳氏)로 유근(柳根)의 딸이다. 부친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이어 모친까지 사망하면서 22, 23세 때 부친과 모친상을 잇달아 치렀다. 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강계 부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이귀·이괄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정사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병조참판을 거쳐 벼슬이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로 왕을 모시었다.

환도 후 영의정이 되고 승평부원군이 되었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북저집>이 있다. 문과에 급제할 때부터는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교, 주서, 봉교 등을 역임하고 형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 전주판관등을 많이 역임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 홍문관부교리를 역임하고 강계부사까지 역임하고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북인들로부터 모함을 받고 쫓겨난다. 이후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과 ‘함께 만 번을 죽더라도 종사를 위해 계책을 도모하자’는 모의를 하게 된다.[1]

1623년, 인조반정에 참가한 뒤에 병조참판, 예조참판, 대사간,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3월 12일 아들 김경징 및 신경유, 조흡, 이성연 등과 함께 창의문을 통해 대궐로 들어갔다. 반정 이후 모든 수습책과 제반 군무는 그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반정 직후 그는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맡았다.[1] 반정 후 안정이 필요한 시기에 그는 병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이란 임무를 띠고 수습에 나섰다. 두 직책은 문과 무에 정통해야 수행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오직 인재를 발굴하고 붕당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했다.[1]

"대신은 체면을 중시해야 한다. 체면이 한번 무너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혁명 이후에는 논공행상과 사회 질서를 둘러싸고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공신들에 의해 주도된 죄인들을 잡아 다루는 일은 자칫 저항과 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는 그것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양관 대제학과 정사공신 1등에 승평부원군으로 봉해진 것도 인조반정이 단행된 그해였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공주로 왕을 호종하기도 했으며 그 공으로 대사헌, 한성부판윤, 도승지, 우찬성을 지냈다.

이괄의 난 직후 인조와 공신들은 도망치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반대파들을 처리하려 하였다. 당시 감옥에는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다. 김류는 이들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했다.[2]

같은 반정 공신이자 서인인 이귀는 이에 반대하였다.

수감된 사람들 가운데는 높은 제신들이 많은데 이들이 꼭 이괄과 같이 반란을 할 이유는 없을 것이오. ...(이하 중략)... 한 사람이라도 죄없이 죽이는 것은 왕도 정치에서 삼가는 것인데 이제 신문하지도 않고 혐의없이 죽인다면 뒷날 후회가 될까 합니다. 게다가 기자헌은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절의를 세우다가 귀양갔던 사람인데, 어찌 사리를 분별하여 밝히지 않고 하나같이 모두 죽이겠습니까?[3]

라고 반대하였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49명의 반대당 인사들은 그의 건의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2]

1625년, 이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고 도체찰사 장만 밑에서 부체찰사로 활약하였으며 예조판서,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는 1634년 3월 김유와 이귀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술이 절반쯤 되었을 때 세자와 대군을 돌아보고, “너희들은 이 두 사람을 마치 부형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1] 3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하루에도 두 번씩 김유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1]

김유는 팔도도체찰사 겸 영의정이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발했던 그의 지혜도 창졸간에 당한 청나라 대군과의 전쟁에선 화의론(和議論)이라는 변통책밖에 뾰족한 수가 없어 인조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1]

1638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고, 김유 자신도 인조반정 3등 공신으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1] 그러나 인조는 “이번에 성을 지킨 것은 김 아무개(김유를 지칭)의 힘이었다”고 비호했고, 거듭된 신하들의 주장으로 문외로 송출했다가 이듬해에 특명으로 예전의 직책으로 서용했다.[1]

거듭된 공신들의 반역으로 더욱 심란해진 인조는 결정적으로 1등 공신이었던 심기원이 인조22년(1644)에 반역을 꾀하자 “공이 높고 덕이 많으니 광제(匡濟)의 책임을 경을 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라며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영의정을 내렸다.[1]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난이 벌어지자 평정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고,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서훈되었다. 이때 김유는 8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했다. 국왕 또한 승지를 보내 간곡한 말로 전교를 내려 직에 나오도록 하였지만 북저는 20여 차례에 걸친 사직으로 끝내 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인조는 공훈 훈적 삭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1]

저서

  • <북저집>(北渚集)

가족 관계

  • 증조부 : 김수렴(粹濂)
    • 할아버지 : 김훈(金壎)
      • 아버지 : 김여물(金汝岉)
      • 어머니 : 박수강(朴壽岡, 함양박씨)의 딸
        • 부인 :진주 유씨- 유근의 딸
          • 아들 : 김경징(金慶徵)
          • 자부 : 박효성(朴孝誠, 고령박씨)의 딸
            • 손자 : 김진표(金震標)
  • 평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동명 정두경과 백헌 이경석이 내린 객관적 평이다.[1] 찌질하고 못난 아들을 두어서 집안을 망친 상병신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그의 장인 서경동인, 남인이었다. 서경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예조판서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국왕을 호송한 공을 세운 당대의 대표적 정치가였다.[1]

 

[출처]엔하위키 미러

김유(金瑬)


 

1571~1648


 

조선 광해군, 인조 때의 문신. 광해군 시절에는 강계 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기 충주에서 신립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김여물이다.


 

본인도 왜란 당시 종사관을 지내며 전공을 세웠지만 전쟁 말기,하필이면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탄핵되었다.


 

당대 권신 중 우유부단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인물이지만, 젊은 시절엔 소신이 있었던지 북인과 대립각을 세우며 폐모론을 반대했다. 광해군일기 기록을 보면 그 일로 양사로부터 공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자신의 삼촌 뻘 나이인 이귀와 연을 맺고 나라를 뒤집기로 합의를 본다. 마침내 인조반정이 시작됐는데, 대장으로 선임되어놓고도 정작 반정 날 제때 오지 않아 이귀의 임시 비책으로 이괄이 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반정이 순조롭게 풀려가는 상황에서 뒤늦게 나타나서는 이괄에게 자신이 대장이니 빠지라는 적반하장의 행태를 보였다. 이미 이 때부터 김류와 이괄의 악연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공신책봉이 이루어졌는데, 김류는 이귀와 함께 1등 공신에 올랐고 정작 김류의 빈 자리를 메워가며 역할을 다한 이괄은 2등 공신에 오른다. 당시 김류의 발언을 보면 "이괄은 당초에 결의하지 않았으나 뭇 사람의 마음을 고동시켰고 군용을 갖추는 데 이괄의 공이 컸기 때문에 2등 공신의 첫번째에 올린다"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창립 멤버도 아닌 별 같잖은 놈이 그나마 노력은 가상해서 2등 정도는 준다.는 설명인데 정작 본인은 중요한 거사날 태연히 지각한 주제에 낯짝이 보통 두껍지 않다(…).


 

게다가 별로 한 것도 없던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2등에 올랐다. 즉, 이괄과 김경징이 동급이라는 소리. 당연히 이것은 이괄의 불만을 더 크게 해, 인조 재위 초장부터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다.


 

어찌어찌 잘 묻어가서 인조에게 사랑도 받고[1] 결국 영의정까지 오르게 되지만 해놓은 짓을 보면 욕먹을 일 투성이다. 호란 당시 방어 총책임자인 도제찰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건성건성 일하지 않나, 군관은 죄다 자기 식솔과 재산 보디가드로 써먹지 않나. 결국 아들과 더불어 청군이 조선을 신나게 유린하는데 간접적 기여를 했다.[2]


 

그럼에도 인조 치세 내내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려 애쓴 덕에 갖은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정계에서 살아남았다. 심지어 조정 전체가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라져 있을 때조차도 일관성 없다는 비난을 감수하며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1623년의 인조실록 기록을 보면 사임하고자 하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 뒤에 한번 더 사임을 청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적어도 인조의 그에 대한 애착은 분명해 보인다.


 

말년에 심기원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데 큰 기여를 했고 그 덕택에 심기원과 대립하던 김자점버프를 받았는데,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김자점이야말로 진국 간신배이자 매국노였다(…). 결국 김자점은 뒤에 비참한 최후를 당하지만 김류 덕에 그나마 생명연장을 한 셈.


 

노년에는 소현세자를 비판하고 봉림대군(효종)을 밀었다. 하지만 끝내 봉림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당대의 중신 최명길은 김류에 대해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고 평했다. 즉, 큰 일을 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은 호란과 그외 삽질로 인해 다른 시기 공신들에 비해 평이 굉장히 안 좋다. 물론 그 중에 엑스맨 김자점이 들어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아들 김경징이란 놈은 병자호란 때 중책을 맡고도 술만 쳐마시다 요충지를 에게 빼앗기는 과오를 범해 결국 사사되었다. 아비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으면 아들도 그런 책임을 떠맡아서 비참한 최후를 당할 일 자체가 없었을테니, 어쩌면 업보일지도.


 

드라마 궁중잔혹사에서는 배우 김종결씨가 맡아 연기했다. 작중 등장하는 중신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로서 노회한 정객의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드라마 후반에 소용 조씨에게 관광을 당하고 그녀로 인해 왕실이 개판이 되어가는데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없다는 사실에 통탄해하다 리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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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반정을 모의하던 당시 능양군이던 인조를 왕의 재목으로 추천한 사람이 김류였다
  • [2] 심지어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일때 홀로 기습을 주장해서 아까운 병력을 잃기도 했다

최종 확인 버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류 선생 영정」
조선 후기 경기도 안산 출신 김류의 초상화.


[개설]
김류는 조선 후기의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김여물의 아들이다.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愼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으며, 이 공으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김류 선생 영정」은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김류 선생 영정」은 김류가 정사공신에 책록될 당시 그려진 것을 모본으로 하여 영의정에 올랐을 때 모사한 화첩본으로 보인다. 좌측에 “인조대왕반정일등공신영의정승평부원군김대신촬형상(仁祖大王反正一等功臣領議政昇平府院君金瑬大臣撮形象)” 이란 기문이 있다.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안면 윤곽은 진한 갈색 선으로 잡고 주조색은 밝고 엷은 살빛으로 강약으로 주어 명암을 나타내고 있다. 기문에서 ‘촬형상(撮形象)’이라고 한 것은, 전신 중에서 일정 부위만을 묘사하는 화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특히 목 위로 치켜 올려진 단령의 형태 등은 당시의 공신도상(功臣圖像)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김류 선생 영정」은 지본설채(紙本設彩)이나, 어깨의 선 처리 등에서 17세기 초상화의 양식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에 있는 김류의 신도비.


[개설]
김류(金瑬)는 문신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록되었다. 병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1644년(인조 22) 3월 심기원(沈器遠)이 반역을 일으키자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봉해졌다.


[건립경위]
김류 신도비는 1968년 김류의 10세손 김상묵(金商墨)과 11세손 김수연(金秀淵) 등이 주관하여 순천김씨(順川金氏)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형태]
거대한 기단석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세웠고 이수(螭首)를 얹었으나 용을 양각한 조각 형태가 옛날 선인들의 솜씨에 비하여 좋지 않다.


[금석문]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비 전면에 ‘승평부원군김공신도비명(昇平府院君金公神道碑銘)’라 새겨져 있다. 김류가 별세한 후 송시열이 지은 비문을 그대로 석각(石刻)하여 세운 것이다. 김류 후손의 형편으로 보아 송시열에게 비문을 받아 즉시 신도비를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생존해 있는 후손 중 누구도 구비(舊碑)를 보거나 전해들은 바가 없다고 한다.


[현황]
김류 신도비 옆에는 김류의 부친인 김여물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또한 옆에는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 있는데,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여물의 충신문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이 집안 4대 여인들의 열녀문이 봉안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단원구 와동에 있는 사세충렬문 내 김류 처 진주유씨의 정려이다.

 

[정의]
조선 후기 안산에서 거주하였던 열녀.


[가계]
아버지는 진주부원군(晋州府院君) 유근(柳根)이며, 남편은 김여물의 아들이자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류(金瑬)[1571~1648]이다.


[활동사항]
김류의 아내 진주유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고자 1637년 1월 25일 강화 앞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때 4대에 걸친 고부(姑婦)가 함께 목숨을 끊었는데, 진주유씨를 비롯하여 김여물[김류의 아버지]의 후실 평산신씨, 김경징[김류의 아들]의 부인 고령박씨, 김진표[김여물의 손자]의 부인 진주정씨가 그들이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때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에게는 충신 정려가 내려지고, 병자호란 시 순절한 평산신씨·진주유씨·고령박씨·진주정씨 등에게는 열녀 정려가 내려졌다. 이들의 정문인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은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

인조반정후 일등공신이었던
승편부원군 김류
연평부원군 이귀
의 주류가 정권이 대립되던 시기에
정묘년(인조5년 1627년)후금국(누르하치는 죽고 그의 네째아들 홍타시가 대를 이었음)군사가 조선으로 쳐들어옵니다.
이 계기는
갑자년 이괄의 편에서 싸웠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만주로 달아나
후금국에 의탁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문상을 오지 않아서 분개한 이유도 있음
그의 관한 소식을 들은 김류는 인조에게
파천하자고 제의 했고.이귀는 반대했습니다.
결국엔 김류의 권유에 의해 왕은 강화로 갑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국은 위협을 느끼고
조선에 화의를 제의 합니다.
양국은 형제국이다.라는 등의 약속
이걸 정묘호란이라 해요

병자호란

그러던중 왕비 인렬왕후한씨가 승하하셨습니다.
인조와 한씨 사이에는
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대왕)인평대군 용성대군이 있습니다.

인렬왕후 승하소식을 들은 후금국에서 조문을 하겠다고 나섰던것입니다.
후금국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스스로 황제국이라 칭하였습니다.
청나라에서는 조상한다 하여 용골대 마부대(모두 사람이름)
사신들이 군사 2백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 사람들을 오랑캐라 칭하고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불만을 느낀 청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을 황제국의 환대를 하라고
말합니다.
청나라 힘의 무서움을 느낀 조선은 이에 대해 기본적인 예를 갖추어
주자고 하고선 문상을 받게 합니다.
문상을 하던 도중 장막뒤에 있던 무장한 조선 군사를 발견하고는
달아났습니다.
사실 청나라 사신들이 오해한거죠
장막뒤에 있던 군사는 경호원이었으니까요
그리하여 광분한 청나라에서는 조선을 무찌르려고 합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던 조선으로서는 막질 못하죠
그때 임경업이 나타나 병력 이만을 주시면 적병을 막을수 있다고
했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압록강이 얼어붙었을때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청나라 군사는 압록강을 거슬러 조선땅으로
쳐들어옵니다.
또다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갑니다.
남한산성에서 강화로 가려 했지만
날이 추운데다 진눈깨비가 내려 빙판이 졌기 때문에
강화로 갈수 없었습니다.
산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할수없이 항복하기로 결정합니다.
40여일간의 악전고투였죠
그리고 인조는 광주 송파 삼전도 나룻가에 나가게 됩니다.
거기서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게되고 신하의 예를 갖추게 됩니다.
-삼전도의 굴욕이지요-
그러면서 청나라는 철군할때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로로 삼고 심양으로 끌고갑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지요.

 

인조반정 [仁祖反正]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류(金)·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攽)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2009-07-14 05:51 | 출처 : 두산백과사전

 

['김유'에 대하여 공부한 내용]

매주 목요일 10시~12시, 서현문화의 집-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듣는다...

2014년 9월11일 목요일...오늘은 이웅재 박사의 강의가 있었는데...주제는 '『연려실기술』에 보이는 남한산성'이다...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그의 아버지가 유배되었던 '신지도'에서 42세 때 부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에 걸쳐 편찬한 야사라고 한다...

『연려실기술』제25권 인조조 고사본말의 '병자노란'과 '정축 남한출성'조를 초록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듣는 중...

병자호란 때 이시백이 남한 수어사가 되었는데...시백의 아버지 이귀가 항상 김류와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김류는 시백이 남한산성의 수비를 청하는 모든 일에 그 요청을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므로...김유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었다...ㅋㅋ...

 

김유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 2가지가 모두 있다...ㅋㅋ...

 

< 긍정적 내용>

① 서인의 영수이고, 인조반정을 기여한 공로로 정사1등공신에 책록되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반정을 모의하던 당시 능양군이던 인조를 왕의 재목으로 추천한 사람이 김류였다...

    반정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피란했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로 왕을 모시었다.

② 그는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북저집>이 있다.

③ 인조는 1634년 3월 김유와 이귀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술이 절반쯤 되었을 때 세자와 대군을 돌아보고, “너희들은 이 두 사람을 마치 부형처럼 여겨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3년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하루에도 두 번씩 김유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난이 벌어지자 평정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고,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서훈되었다.

    이때 김유는 8번이나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했다. 북저는 20여 차례에 걸친 사직으로 끝내 직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인조는 공훈 훈적 삭제는 윤허하지 않았다.

⑤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의 서문을 쓴 동명 정두경과 백헌 이경석이 내린 객관적 평이다

⑥ 임진왜란 때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한 부친 '김여물'에게는 충신 정려가 내려지고, 병자호란 시 순절한 평산신씨·진주유씨·고령박씨·진주정씨 등 4대에 걸친 고부(姑婦)에게는 열녀 정려가 내려졌다.

 

 

☞김류의 아내 진주유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고자 1637년 1월 25일 강화 앞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때 4대에 걸친 고부(姑婦)가 함께 목숨을 끊었는데, 진주유씨를 비롯하여 김여물[김류의 아버지]의 후실 평산신씨, 김경징[김류의 아들]의 부인 고령박씨, 김진표[김여물의 손자]의 부인 진주정씨가 그들이다. 이들의 정문인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은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부정적 내용>

인조반정이 시작됐는데, 대장으로 선임되어놓고도 정작 반정 날 제때 오지 않아 이귀의 임시 비책으로 이괄이 대장을 맡았다...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공신책봉이 이루어졌는데, 김류는 이귀와 함께 1등 공신에 올랐고 정작 김류의 빈 자리를 메워가며 역할을 다한 이괄은 2등 공신에 오른다. 게다가 별로 한 것도 없던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2등에 올랐다. 이것은 이괄의 불만을 더 크게 해, 인조 재위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한다.

② 이괄의 난 직후 인조와 공신들은 도망치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반대파들을 처리하려 하였다. 당시 감옥에는 전 영의정 기자헌 등 49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다. 김류는 이들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인조에게 주살할 것을 청했다. 같은 반정 공신이자 서인인 이귀는 이에 반대하였다...이는 묵살되었고 49명의 반대당 인사들은 그의 건의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

③ 호란 당시 방어 총책임자인 도제찰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도 건성건성 일하지 않나, 군관은 죄다 자기 식솔과 재산 보디가드로 써먹지 않나. 결국 아들과 더불어 청군이 조선을 신나게 유린하는데 간접적 기여를 했다.

④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일때 홀로 기습을 주장해서 아까운 병력을 잃기도 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때 부총관 직을 맡은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파직과 삭탈관직이 되어 향리로 방축됐다

⑤ 1638년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강화도 수비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했다...찌질하고 못난 아들을 두어서 집안을 망친 상병신이라는 평가도 있다.

 

- 2014년 9월11일 목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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