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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왕희지,구양순, 안진경 서체 등/해인사 장경판전 1장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서체 등]

 

2014년 8월14일 목요일 오전 10시~12시...'서현문화의 집'에서 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한국서예문화의 역사' 이고...강사는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이다.

서예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므로 강의를 들으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ㅠㅠ...^-^  

 

옛날에는 '초서'로 천자문을 배웠는데...선조 때 한석봉의 천자문으로 인해 '초서'로 배우지 않게 되었다는 강의를 들었는데...

솔직히 말해..."초서/해서/행서/예서/전서" 등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ㅠㅠ...^-^ 

 

이에 인터넷 검색으로 글씨체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명필 '한석봉'이 꿈속에서 보고 좋아했다는 왕희지체, 팔만대장경의 글씨는 구양순체 등을 알게 되었다...ㅎㅎ...^-^

 

왕희지는 거위의 목놀림과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서법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 특유의 초서체 필법이 왕희지체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ㅎㅎ...^-^

 

- 2014년 8월15일 금요일...수산나 -    

 

-왕희지(307~365) 체-

 

동진(東晉) 사람인 왕희지는 한나라 때 생겨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승화시킨 중국 최고의 서예가였다. 생존 당시에도 그의 서체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아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만이 전해지는데 서풍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기품이 높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가, 초서로는 《십칠첩(十七帖)》이 전해진다. 672년 당(唐) 고종의 명을 받아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는 그의 서풍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도 《순화각첩(淳化閣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에 필체가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희지체 [王羲之體] (두산백과)

 

[그림이 있는 아침]  거위가 가르쳐준 서법의 비결-한국경제-

입력
2013-01-14 17:01:53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동진의 명필 왕희지(王羲之·303~379)는 거위를 좋아했다. 아름답고 유연한 곡선미, 호수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우아한 자태에 매료됐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 창안에 골몰하던 그는 거위를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할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산 속의 도사가 거위를 키운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길로 득달같이 달려가 팔기를 청했더니 도사는 뜻밖에도 노자의 도덕경을 써달란다. 즉석에서 일필휘지 써내려가자 눈이 휘둥그레진 도사는 자신이 키우던 거위를 몽땅 왕희지에게 안기고 사라졌다.

그때부터 그는 밤낮없이 거위의 목놀림과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서법을 연구했다. 청말의 화가 임백년(任伯年·1840~1895)의 ‘희지애아도(羲之愛鵝圖)’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남들이 한창 선배들의 서체를 모방할 때 그는 자연을 스승으로 삼았다. 역대 최고의 서체로 꼽히는 왕희지체는 그렇게 탄생했다. 틀 밖의 사고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원천임을 왕희지의 삶은 잘 보여준다. 우물 밖에 해결책이 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구양순(557~641) 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자 한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양순체 [歐陽詢體] (두산백과)

 


- 안진경(709-785) 체 -

 

안진경은 당나라의 서예가로서 해서·행서·초서에 모두 능했는데,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한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과 균제미(均齊美)가 있어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안진경삼고(顔眞卿三稿)’라 불리는 《제질문고(祭姪文稿)》 《고백부문고(告伯父文稿)》 《쟁좌위고(爭座位稿)》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고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당시 유행했던 진(晉)의 서예가 왕희지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서체를 본뜨지 않고 스스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고 평가된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든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중국의 과거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으며, 명나라의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는 간행된 서책의 대부분이 안진경체이다.

그의 글씨는 후대 중국의 명필 유공권(柳公權)·소동파(蘇東坡)·채경(蔡京)·동기창(董基昌)·왕탁(王鐸)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한호(韓濩)·조광진(曺匡振)·김돈희(金敦熙) 등이 특히 안진경체에 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진경체 [顔眞卿體] (두산백과)

 

 

[충무공 친필 漢詩 한 편 새로 발굴]...동아일보-입력 2014-04-23 03:00:00

 

임진왜란 전 정읍 현감 시절 작품… 전란 예감 유비무환 자세 엿보여



주위는 어둠이 내리고 곧 폭설이 내릴 기세다. 허나 청명한 달빛만은 고고하게 풍전등화의 세상을 비춘다. 나라 위한 마음이 어찌 이와 다를까. 추운 겨울이면 백성의 고충이 더욱 와 닿지만, 매화의 절개를 되새기며 뜻을 펼 때를 기다린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친필 한시 한 편이 새로 발굴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건 난중일기에 실린 5편을 포함해 17편으로, 임진왜란 발발 전 정읍 현감 시절에 쓴 친필 한시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은 22일 “충무공이 45세가 되던 해 지인에게 보낸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찾았다”고 밝혔다. 제목 없이 ‘증김중군사명(贈金中軍士明·중군 김사명에게 보내다)’이라고 적혀 있는데 김사명은 절친했던 무인으로 추정된다. 경남대박물관 소장 사료에 포함돼 있던 이 시는 노 소장의 연구 끝에 충무공의 시로 확인됐다. 노 소장은 “충무공 특유의 왕희지 초서체 필법이 뚜렷하고 특히 이름과 ‘何(하)’ 같은 글자에서 충무공이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곧 폭설이 세상을 뒤덮을 날씨 속에서도 빛나는 달빛을 노래한 모습에선 전란을 예감하면서 ‘유비무환 임전무퇴’의 뜻을 가다듬는 무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23일 출간되는 노 소장의 ‘이순신의 리더십’ 개정판에 실렸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장경판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