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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사경체(2014.8.15.금)/국립중앙박물관 '야외의식용 불화' 3장

 

[사경체]

 

2014년 8월14일 목요일 오전 10시~12시...'서현문화의 집'에서 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한국서예문화의 역사' 이고...강사는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이다.

서예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므로 강의를 들으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ㅠㅠ...^-^  

 

옛날에는 '초서'로 천자문을 배웠는데...선조 때 한석봉의 천자문으로 인해 '초서'로 배우지 않게 되었다는 강의를 듣고...

솔직히 말해..."초서/해서/행서/예서/전서" 등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ㅠㅠ...^-^ 

 

이에 인터넷 검색으로 글씨체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사경체'에 대하여 일단 한번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ㅎㅎ...^-^

 

- 2014년 8월15일 금요일...수산나 -    

 

[공주 가죽갑옷, 백제 전설적 갑옷 ‘명광개’ 가능성]...경향신문-입력 : 2011-10-13 21:49:44

 

ㆍ구양순체로 쓴 명문도 발견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백제 말기의 옻칠 가죽갑옷이 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고대삼국의 가죽갑옷이 발견된 것은 처음인 데다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명문이 있어 새로운 문자자료의 출현을 열망하는 고대사학계는 이번 발굴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특히 붉은색 명문은 갑옷의 쓰임새와 제작자뿐만 아니라 당시 백제의 문화교류 수준을 밝혀줄 단서로 주목받고 있다.

백제 갑옷은 공주 공산성 성안마을의 백제 왕궁 부속시설인 저수시설의 바닥에 인접한 펄층에서 다수의 화살촉과 함께 발견됐다. 지난 9일 처음 갑옷 비늘이 확인된 후 11일 무리지어 발견된 갑옷의 비늘 조각들은 1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옻칠의 유리빛 광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비늘에서는 갑옷 몸체에 실로 매달기 위해 뚫은 게 분명한 바늘구멍이 확인됐고, 6개의 갑옷 비늘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 정관19년 4월21일)’ ‘王武監(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이○은○)’ 등으로 읽히는 붉은색 글씨가 유려한 서체로 적혀 있었다. 당태종의 연호인 정관19년은 갑옷의 제작연대가 서기 645년임을 알려준다.

공주 공산성에서 발견된 백제 갑옷. 원 안은 갑옷 비늘에 쓰여진 붉은색 명문.

 

서예학자인 손환일 경기대 교수(문자사)는 명문에 쓰인 글씨체에 주목했다. 손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명문은 사경체, 구양순체, 예서체 등 세 종류의 서체가 자유분방하게 사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 ‘年’자는 가로획을 네개로 해 예서법으로 썼고 정자로 쓴 ‘日’과 ‘行’은 사경체, ‘九’ ‘貞觀’은 구양순체”라며 “전체적으로 구양순체가 바탕을 이루면서 사경체와 예서체가 자유자재로 구사됐다”고 분석했다. 손 교수는 “불경을 필사할 때 사용하는 사경체를 쓴 것은 당시 불교활동이 왕성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글을 주묵(朱墨·붉은 먹)으로 쓴 것은 종교적,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구양순체를 쓴 것도 주목할 점이다. 손 교수는 “당의 서예가인 구양순이 죽은 해는 641년으로 불과 4년 만에 구양순체가 백제에 들어왔다면, 백제의 당문화 수용이 상당히 신속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옻칠 갑옷이 백제 물건인지, 당나라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렸다.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장은 “이 갑옷은 문헌에만 보이는 백제의 전설적인 갑옷 ‘명광개(明光鎧)’일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백제가 자체 제작한 갑옷일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당나라 군인이 버리고 간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혜선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명문에 나온 ‘정관19년’이 중국 문헌인 ‘책부원구’에서 당태종이 정관19년에 백제국에 주문해 전투형 갑옷에 황금색칠을 했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게 흥미롭다”며 “가죽의 옻칠이 현재는 흑색이라 이것이 황칠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색된 것인지, 옻칠인지는 더 조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명광개는 백제뿐 아니라 수당기에 양당개와 함께 유행한 갑옷으로 황색칠이 되어 있고 양쪽 가슴에 호심이라는 판이 붙어 있다.

한편 손환일 교수는 가죽갑옷이 당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그는 “옛날 중국 글씨는 틀에 딱딱 맞춰 서법을 중시했고 일본은 갈겨 쓰는 필사가 유행했다”면서 “자유분방한 명문의 서체를 볼 때 백제사람이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주박물관은 갑옷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결과가 나오려면 최소한 6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이남석 공주박물관장은 “비늘조각이 1000개 정도 되지 않을까 한다”면서 “이들 조각을 세심히 기록하고 출토상황을 검토하면 갑옷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물관 측은 갑옷이 발견된 공산성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장소인 만큼 전쟁 중 갑옷이 벗겨졌을 가능성과 제사를 지낸 뒤 매장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인천 계양산성 ‘논어 목간’ 400~480년 한성백제때 제작]...경향신문-입력 : 2008-11-12 17:42:13

 

ㆍ한자·경전 도입도 입증 획기적 자료 평가

2006년 인천 계양산성에서 확인된 ‘논어 목간’은 AD 400~480년 사이, 한성백제 때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시기에 한자는 물론 경전(논어)까지 이미 도입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선문대 고고연구소(소장 이형구)는 2004년부터 2년간의 발굴 성과를 담은 ‘계양산성’ 보고서에서 “목간과 같은 층위에서 출토된 목재 2점에 대한 AMS(가속기질량분석) 연대측정 결과 AD 400년과 AD 480년이었다”고 결론내렸다.

잔존 길이 13.8㎝로 지름 2㎝ 정도 크기의 목재를 5면으로 깎아 만든 이 목간은 2005년 5월, 산성내 집수정 바닥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적외선 촬영 결과 목간 5면에는 ‘논어’의 제5장 공야장(公冶長)의 일부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주목을 끌었다. 공야장은 공자의 제자이자 사위이다.

목간을 보면 ‘(子謂子)賤君子(哉若)人’, 즉 공자가 자천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즉 공자가 칠조개라는 인물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자 칠조개가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孟武伯問~求也~)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 즉 맹무백이 공자에게 구(求·공자의 제자인 염유)에 대해 묻자 공자가 “그가 인자한지는 알 수 없다”고 답하는 대목도 있다.

이 목간은 당시 전형적인 한성백제시대 토기인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밑이 둥글고 목 짧은 항아리)와 같은 층위에서 발견돼 한성백제시대인 4세기대 유물로 발표됐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목간연구자들은 이 목간을 신라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목간 서체는 ‘둔황문서(敦煌文書)’나 ‘러우란(樓蘭)잔지(殘紙)’에서 사용된 4~5세기 사경체(寫經體)와 관련이 깊다”면서 “이런 사경체는 해서(楷書)가 정착되기 이전의 필획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연구자들이 목간을 직접 보지도 않고 신라 것이라 판단했다”고 학계의 그릇된 연구 태도를 나무랐다.

보고서에서는 또한 이미 공개된 논어 목간 외에도 역시 집수정에서 출토된 또 1점의 목간을 추가로 공개했다. 이 목간은 총길이 49.3㎝나 되지만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자(子)’자뿐이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子)’자로 미루어 보아 이 목간 역시 논어를 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손환일 교수에 따르면 한자는 전국시대 때 이미 한반도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372년 태학을 세워 유교경전으로 교육했을 것이다. 백제의 경우엔 6세기 무렵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파견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손 교수는 “그런 점에서 이번에 확인된 400년대 논어 목간은 한자도입과 유교 수용을 입증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실물자료”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형구 교수는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의 중심지에는 당대 중국, 즉 서진(西晉·265~316년)과 동진(東晉·316~420년)시대 시문도기와 자기류가 출토된다”면서 “중국문물이 들어왔을 때 논어와 같은 경전도 함께 도입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환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왕희지체를 구사한 백제 목간>


백제시대 지방 木簡 나주서 첫 출토 (나주=연합뉴스) 24일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백제시대 목간. 나주문화재연구소는 최근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404호) 일대 정비를 위해 그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철기를 생산한 제철(製鐵) 유적과 함께 백제 지방사 연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문자 목간 2점을 수습했다. 이 중 첫번째 목간. 이 목간은 길이 8.4㎝, 너비 4.1㎝, 두께 0.5-0.6㎝의 크기다. << 문화재청 제공 >>

필체 유려..치밀한 인력관리 입증

(나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가 24일 공개한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 주변 발굴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에 운영한 '관영 제철소' 흔적을 확인했으며, 둘째 관(官)에 의한 인력운용 실태를 엿보게 하는 문자 자료인 목간(木簡)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언뜻 이 두 가지는 별개인 듯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발견됐다는 점 이외에 발굴성과 자체에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제철 유적과 목간 내용 자체는 물론이고 이 둘을 이어주는 고리가 다른 유물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현재까지 2점이 발견된 목간은 정확한 판독과 해석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제철소 운영과 관련된 인력 운용 체계 내용을 담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번 목간에서는 '…(年)三月中監數長人 / …出省者(得)捉得□奴…' 정도로 읽힐 수 있는 묵서(墨書) 16글자가 2행에 걸쳐 확인됐으며, 이는 대체로 "어떤 해 3월에 서너 명의 장인(長人)을 감독했고"(첫행), "출생(出省)한 자는(혹은 출생하면) 체포하여 노비로 삼을 수 있다"(둘째행)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관리 혹은 감독을 의미하는 '監'(감)이라는 글자와 그 대상이 '長人'(장인)으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長人'을 '監'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아쉬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 '장인'이 제철소와 같은 노동 현장에 투입된 인력 중 우두머리 정도에 해당된다는 데 전문가들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서체 전공인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장인은 요즘의 '십장' 정도로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목간학 전공인 이용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목간을 통해 최소한 3단계로 이뤄진 백제의 인력 운용 실태를 엿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즉, 관청에서는 십장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통해 현장 노동인력들을 통제하고, 그 아래에는 실제 노동력을 제공하는 '奴' 즉, 노비와 같은 계층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1번 목간 2행 또한 첫 머리가 잘려나가는 바람에 '出省'이란 두 글자를 떼어서 읽어야 할지, 아니면 합성어로 읽어야 할 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건 '省'(성)이라는 글자가 기본 뜻이 '살핀다'이며, 이에서 '감시한다'거나 '감독한다'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므로 '出省者' 혹은 '省者'는 현장 노동력을 감시하면서, 때로는 현장을 무단 이탈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부릴 수 있는 사람 정도로 볼 수 있다고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박종익 학예연구실장은 지적했다.

두번째 목간은 워낙 훼손 상태가 심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잔존 길이가 무려 32㎝에 이르는 대형 목간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묵서 수십 글자가 확인되지만 이에서 판독이 가능한 대목은 '兄將○立○○○四二 中口四 ○二 …○○○○○ ○定文丁○○一女○ ○○○○二巴四入○○○○ 定' 정도다.

심영섭 나주문화재연구소장은 이 중 "마지막 '定'이라는 글자는 혼자서 떨어져 목간 중앙부 하단에서 확인되므로, 혹시 문서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부호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면서 "그 외 '中口'(중구)니 '文丁'(문정)이니 하는 구절은 정확한 의미는 아직 불명이지만, 인력 동원과 관련된 구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정'은 문서를 담당한 사람으로 보이며, '중구'는 이용현 박사에 의하면 15-59세에 해당하는 남성으로 국가에 대해 노동력의 의무를 지는 계층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목간에서 불완전하나마 현재 읽어낼 수 있는 이와 같은 내용은 결국 백제가 6-7세기 무렵 '문서 행정'을 통해 인민과 지방을 지배, 통제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그 인민들을 연령이나 계층별로 세밀하게 구분했음을 알려준다고 입을 모았다.

나아가 이런 내용을 담은 목간이 더욱 구체적으로는 제철소 운영과 관련된 것이라는 데도 의의 제기는 없었다. 이런 점에서 백제 유물임이 확실한 한 백제토기에서 '관내용'(官內用)이란 명문이 확인된 점은 비상한 관심을 끈다.

관에서 사용한 기물이란 뜻이니, 이는 결국 이 제철소를 관에서 운영했다는 데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철기문화사 전공인 이남규 한신대 교수는 "이런 발굴성과는 수도에서 훨씬 떨어진 변방에서도 '관영 수공업'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면서 "다만 주변에 마땅한 철광산이 없는 점을 고려할 때 모래에서 채취하는 사철(沙鐵) 계통 제련소가 아닐지 의심이 간다"는 견해를 덧붙였다.

문서 행정이라는 측면에서 3점에 달하는 벼루 또한 주목된다. 벼루는 당연히 글자를 쓰기 위한 도구이며, 이런 유물이 지방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문자생활이 이뤄지고, 나아가 이를 통한 문서행정이 시행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데 이날 공개된 유물 중에서 단연 관심을 끈 것은 목간 자체와 그에 구사된 필체였다.

이 발굴의 중요성을 감안해 현장에 직접 모습을 나타낸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내가 글씨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눈에 봐도 보통 필체가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서체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현재까지 목간에서 본 글씨 중에서도 가장 유려하다고 해도 좋다"면서 "필체는 전형적인 왕희지체이며 이런 점에서 이번 목간 발굴은 남다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부처님 설법’ 눈으로 듣는다

닥종이에 금·은가루로 그린 불경
일 소장품 40점 등 100여점 전시
고려 불교미술 예술·심미성 엿봬

고려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4일부터 시작해 9월16일까지 ‘사경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 전시회를 연다. 변상도를 중심으로 한 전시품목은 100여점. 변상도 중 처음 공개되는 14점, 지정문화재 26점(국보 7점, 보물 14점, 일본의 중요문화재 2점)이 포함돼 있다.

변상도란 불경을 옮겨적은 사경의 앞부분에 있는 그림으로 해당 경전의 대표적인 내용을 압축하여 그린 것을 말한다. 사경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 초기까지 불교가 사실상 국교인 시대에 성행한 불사의 하나. 왕실 및 유력자가 국가의 평안과 국왕의 만수, 자신의 발복을 위해 만들어 봉안했다. 당대 최고 전문가가 최고의 닥종이에 금과 은가루를 아교에 개어 붓으로 썼다.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을 한글자 쓰고 절 한번 하고 하는 식으로 써 오자 하나 없으며 변상도 역시 미려하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배영일 학예연구사는 “불교국이었던 고려의 대표적인 예술품인 만큼 당대 최고의 예술성과 심미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상도는 본디 당나라 돈황사원에서 승려들이 대중 앞에서 불경의 내용을 그린 그림을 걸어놓고 해당 장면을 가리키며 강의하던 데서 유래했다. 한국에서는 13세기 말~14세기 초 절정기에 이르는데, 외침과 내란을 부처의 공덕으로 물리치려 팔만대장경을 만든 시기와 일치한다. 이때 변상도의 전형이 만들어졌다.

변상도는 오른쪽에 경전의 주인이 설법하는 장면, 왼쪽에는 경전에서 가장 설화적인 내용을 뽑아 그리는 구도가 대부분. 설법장면의 비중이 크다. 부처와 보살의 얼굴은 이중 턱, 둥근 얼굴에 각이 진 이마, 긴 눈썹과 눈, 작은 입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그려지고, 설법주는 크게, 법상 아래의 보살들은 그린 작게 2단구조로 되어 있다.

고려의 변상도는 화면 전체의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자연스러운 선묘를 구사하다가 구성이 복잡해지고 도안화되는 게 특징. 무신난 전후가 분수령이다. 충렬왕 무렵 전성기를 맞고 그 이후 패턴화하는 경향이 생긴다. 선이 뻣뻣하고 자주 끊기며, 부처와 보살의 경우 얼굴 윤곽선 안에 이목구비를 붙인 것처럼 도식화한다. 14세기 말에 이르면 설법도 부분이 넓어지고 법상 아래의 보살이 설법주의 법상 위로 올라오는 등 엄격한 2단구도가 깨진다. 구름무늬도 고려때는 다양하지만 조선 초기에 이르면 밤을 깎아놓은 듯 일정한 문양으로 고정된다.


변상도는 어떻게 그렸을까. 흑석사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미완성의 법화경 그림이 힌트가 된다. 변상도가 비어있는 사경과 함께 외곽에 그림연습을 한 낱장의 변상도가 함께 출토되었다. 연구자들은 사경자가 낱장변상도를 모본으로 사경지에 옮겨 그리려다 실패하고 그냥 급한대로 함께 봉안한 것으로 추정한다. 모본을 두고 모사하는 방식이 유행했다는 얘기다.

작은 사진은 사경을 보관하는 함과 갑.

고려사경의 명성은 중국에 널리 알려져 충렬왕 16년(1290년)과 23년(1297년)에 원 세조의 요청으로 고려 사경승이 금자경 서사를 위해 원으로 간 기록이 남아있다. 중국의 사경은 선묘가 가늘어 맨눈으로 그림을 식별하기 힘들고 구도 역시 단순해 고려사경이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도 고려사경의 인기가 높아 명품의 상당수가 일본에 소장돼 있다. 이번에 전시된 사경 100여점 중 40여점을 일본에서 대여해 왔을 정도. 일본 것은 빈 여백이 많고 금니와 은니를 동시에 썼으며 장식이나 광배를 면처리한 게 특징. 치밀하고 섬세한 고려사경과 대조된다.

사경의 서체는 구양순 안진경체가 많다. 고려 후기 충렬왕 즈음에 이르면 살집이 많고 운필이 부드러운 ‘고려 사경체’가 풍미했다. 종이는 최상의 지질과 기술로 제작된 닥종이가 쓰였다. 축축한 종이 여러 장을 겹쳐 두드려 한장의 종이로 만드는 방식이 이용됐으며 제작때부터 갈색, 자색, 감색으로 염색한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황벽나무 즙으로 염색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상수리 또는 쪽 염색이 유행하였다. 색이 속까지 골고루 먹은 것으로 보아 제지단계에서 염색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존처리과 천주현씨는 “잔존 사경의 상태가 좋은 것으로 보아 염색은 방충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쪽빛종이가 많이 쓰인 것은 금이나 은의 빛깔과 대조되어 경전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의도가 더 커보인다”고 말했다.

고려 경전 중 최고의 유품은 고려 목종 9년(1006년) 사성기가 있는 대보적경 권32(일본 중요문화재, 고토국립박물관 소장). 큼직한 글씨가 힘차며 근엄하고 단정하며 변상도의 선은 무척 온화하다.

전시회는 1, 2부로 나뉘는데, 1부에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국보 123호 ‘익산 왕궁리 탑 출토 금제금강경판’을 중심으로 사경도의 요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사경을 보관하던 함, 갑, 보자기 등이 함께 전시된다. 2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사경도의 흐름을 엿볼 수 있도록 시대·주제별로 전시한다. 중국과 일본의 것도 갖춰 대비시켰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출처]중앙국립박물관 ‘사경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전...한겨례-등록 : 2007.07.26 17:48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의식용 불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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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야외의식용 불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