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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회니논쟁/기유의서/경신환국/신유의서

 

*회니(懷泥)논쟁 : 당시에 송시열은 지금의 대전 신탄진 부근인 회덕(懷德)에, 윤증은 충남 논산의 니산(泥山)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니논쟁"이라 한다. 논쟁의 전말은 간단치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수월하지 않다. 논쟁은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되었던 윤휴와의 친분 관계로부터 비롯되어 병자호란 당시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을 둘러싸고 심화되었다. 윤선거는 송시열로 대표되는 당대 주류 성리학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던 윤휴를 높이 평가했는데 이것이 송시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윤선거가 전란 당시 강화도에서 혼자만 빠져나와 목숨을 부지한 것을 두고 송시열 측이 이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급기야 윤선거가 죽고 나서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이 그의 묘비명을 지극히 성의없이 쓰게 되면서 한 때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에 이어 평생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윤증의 처신은 그러한 아픈 내력의 결과가 아닐는지.  

 

 

조선시대[朝鮮時代] 회니논쟁(懷尼論爭)

우리나라 당쟁의 역사[歷史]는 그 뿌리가 깊다. 

좁은 땅덩이 안에서 사문의 논쟁[論爭]으로 날이 지고 날이 새는 지경이었다.

예송 논쟁[禮訟 論爭]을  앞세운 전형적인 권력 투쟁[鬪爭]이었다.

그 중에서 붕당정치 [朋黨政治]의 주요한 분기점은 희니논쟁(懷尼論爭)이었다.

조선조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 과 그의 제자  윤중 사이에 벌어진

사상적 갈등을 말한다.

조선 후기 사색당파[四色黨派]로 분열된 두 학자의 감정적 대립이다.

조선시대 정치는 200년 동안 여당을 했던 노론[老論],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南人], 그 중간에 소론[小論] 3당 구조였다.

노론이 장기집권을 하니까 야당인 영남 남인[南人]은 재야세력으로

벼슬을 하기 어려웠다.

조선 초기 붕당사에서 정철[鄭澈], 율곡[栗谷] , 성혼(成混)문하의 제자들로

형성된 기호학파(경기,호서지방)를 나중에 서인이라 했고,

 

퇴계[退溪], 남명[南冥], 화담[潭]문하의 제자들로 구성된 영남학파를

나중에 동인[東人]이라 했는데, 동인은 정여립[鄭汝立]사건이후

남명계열의 북인, 퇴계 계열의 남인으로 갈라진다.

 

북인은 선조 말-광해군 때 잠깐 정치계에 나오다가, 인조반정[]

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잔존세력은 남인에 합세한다.

 

이에 정국은 남인과 서인으로 양분되고 남인은 왕권중심주의,

서인은 신권 중심주의로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통해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인다.

 

서인은 주자학[朱子學]외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학문경향이고,

남인은 시원유학(천주사상)을 중시하며 주자학을 융통성 있게 해석

연구하는 학풍[學風]이었다.

 

서인이 천주교[天主敎] 탄압에 앞장서고, 남인 윤휴의 자율적 유학경전

해석을 사문의 난적이라 매도한 것은 서인들이 절대적 주자학의

신봉자이며 중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약용[丁若鏞]의 '천주는 상제이다'의 사상은 남인의 최수운

선생의 동학에서 신앙사상으로 이어진다.

 

남인과 소론은 정치적 야당인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민족사상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을 많이 배출한다.

서인은 정치적 여당으로서 조선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본거지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친일파[親日派]로 변신한다.

 

기호학파[畿湖學派]-서인-노론은 조선의 문화중흥을 이끈 주역이면서

조선[朝鮮]을 망친 주역[主役]이기도 하다.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과 소론[小論]의 윤증[尹拯]과의 논쟁의

과정을 보면, 1683년 숙종 9년 서인이 젊은 소장층인 소론과

원로 노장층인 노론으로 분열된다.

그 중심인물은 송시열(老論)과 그이 제자 윤증(小論)이었다.

윤증[尹拯]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서인이면서 대립갈등을 하게 된 경위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갔던 윤선거의 가족은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수난을 맞는데, 청군이 밀려오자 윤선거의 아내는 겁탈을

피해 자결하고 윤선거[尹宣擧]는 평민으로 변장 후 혼자서 살아나왔다.

 

윤선거[尹宣擧]는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온 나라가 척화를

외치며 청군에 항전하였는데 혼자 성문을 빠져나온 것은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士大夫] 사회에서 큰 오점[汚點]을 남겼다.

 

이로써 윤선거는 벼슬길을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우던 윤휴[尹鑴]와 깊은 친분을 맺는다.

 

윤휴는 주자학의 원칙만을 고집하던 송시열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원시유학(주자학이 아닌 시원경전)의 중요성을 역설한 인물이었다.

 

이런 윤휴가 못마땅한 송시열은 윤휴를 '사악한 문장으로 유가 성인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도적놈(사문의 난적)'이라고 몰아붙여 죽게 만들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윤선거는 송시열과 나쁜 감정을 안은 채 사망했다.

이게 그 아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했다.

 

보통 묘갈명은 죽은 이의 장점과 업적 등 생전의 행적을 좋게 지어주는데,

송시열은 술이부작[]이라, 좋게 지어 말하지 않고 남들이

말하는 내용 그대로를 성의 없이 써 주었다.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윤선거의 행적과 윤휴[尹鑴]와의 교분이

여전히 송시열의 감정의 응어리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친에 대한 불만족스런 묘갈명을 받은 윤증은 3년간 여러 차례 걸쳐

묘갈명의 내용을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송시열은 성의가 없었다.

또한 그의 문집에서 강화도 사건에 대해 윤선거를 험하게 몰아붙였다.

 

"수치를 모르고서 말꼴을 먹고는 뻔뻔스럽게 다시 와서 호탕하게 노는구나,

청류를 향해 옷소매를 빨지 마소, 때 묻은 옷소매에 청류 더럽힐까 두렵소"

 

이 글을 읽은 윤증은 송시열을 스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그 둘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비판만이 따를 뿐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회덕(대전)에, 윤증은 니산(논산)에 살고 있어서 이 사건을

'회니논쟁'이라 하였다.

이 회니논쟁을 계기로 윤증을 지지하는 소장파 학자들과,

송시열을 지지하는 원로 노장파 학자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1683년 마침내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으로 서인의 당파가 분열되었다.

이후 숙종[肅宗]이후 왕위 계승 문제로 노, 소론이 얽히면서 예전의

붕당보다 훨씬 격렬한 정치투쟁[政治鬪爭]을 하게 된다.

 

영조[英祖]와 노론,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소론으로 뭉쳐진 붕당의

힘겨루기 등 서인의 장기집권 중 노론[老論]의 시대가 도래한다.

 

남인은 대부분 이퇴계의 제자 문인이며 영남학파의 전통계승자들이며

류성룡[柳成龍], 허목[許穆],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

중농주의[重農主義] 실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서인은 박순[朴淳], 정철[鄭澈], 송익필[宋翼弼], 윤두수[尹斗壽],

최명길[崔鳴吉],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이 있으며

노론 가문에서 김옥균[金玉均], 김좌진[金佐鎭], 김구[] 선생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노론 대부분이 일제 때에 이완용[], 송병준[宋秉畯]

을사오적[]기득권자들은 친일파 귀족으로 변신하여

영화를 누렸다.

 

아무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줄을 서야 했고, 권력의 부침에 따라

권세와 목숨을 맞바꿔야 했던 조선 후기의 이른바 '환국의 시대, 도

여기서 비롯됐다.

 

정조[正祖]의 급서 직후 세도가문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득세할 때까지

이 두 세력의 갈등을 곧 조선왕조[朝鮮王朝] 지배계층의 역사였다.

 

붕당정치의 시초가 된 이 회니논쟁(懷尼論爭)의 중심인물이 된 두 사람의

견해차는 극과 극이지만, 그들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는 자취는 채

100리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송시열이 말년에 내려와 후진을 양성했던 '남간정사'와

온갖 벼슬을 물리치고 낙향해 머물렀던 백의정승 윤증의 고향 집,

'명재고택'이 아주 가까이 있다.

 

성리학[性理學]이 생활규범으로서 서슬 퍼렇던 시절,

완고한 원칙주의자였던 송시열과 변화된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자 윤증은 어쩌면 스승가 제자로서 만나서는 안 될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출처]다음 카페/2014년 9월 일-昔暗 조헌섭

 

 

[기유의서]

기유년에 썼기 때문에 ‘기유의서’라 한다. 편지의 내용은 “남인 윤휴(尹鑴)와 허적(許積)을 참적(讒賊 : 남을 헐뜯는 나쁜 무리)이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으로 송시열의 남인에 대한 가혹한 처사를 충고한 서한이다.

1660년 제1차 예송(禮訟)으로 송시열과 윤휴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윤휴는 일찍이 경전의 주해(註解)에 주희(朱熹)의 설을 배척하고 독자적 견해를 문인들에게 가르쳐, 송시열 일파와는 당론의 차이뿐만 아니라 학문적 입장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고 윤선거에게 교제를 끊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송시열의 뜻에 따르지 않고 죽기 전에 편지를 쓴 것이다. 윤선거의 아들 증(拯)은 1673년 송시열에게 그의 아버지의 묘갈을 지어줄 것을 청하면서 박세채(朴世采)가 찬한 행장과 함께 이 편지를 동봉하여 보냈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 서한을 받아보고 “윤선거는 역시 윤휴의 당인(黨人)이다.”라고 생각하여 고인에 대한 칭송은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한다고 하면서 야유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주었다.

이에 윤증은 여러번 묘갈문의 내용에 대한 개정을 요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약간의 자구만을 수정하였을 뿐 그 내용의 개정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어 노소분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출처]다음 백과사전

 

[경신환국]

 

개요

숙종 6년이던 1680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 숙종 대 최초로 일어난 환국으로, 서인의 입장에서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삼복의 변이라고도 한다. 남인과 연대하였던 왕의 (서자) 숙부들인 창군과 선군과 평군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2. 배경

숙종은 아버지인 현종예송논쟁에 휩싸여 신권에 끌려다니는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4살에 등극하자마자 모후나 대비의 수렴청정없이 곧바로 친정을 하게 되었고, 갑인예송으로 서인들을 한방에 다 날려버린 숙종이었다.

이 무렵 북벌론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윤휴나 허적 등은 청나라가 삼번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를 틈타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무과를 실시해 무려 18,000명을 선발, 대흥산성에 모아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 안 그래도 앞선 갑인예송에서 대판 깨지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서인들의 남인 공격 빌미가 된다.

3. 전개

당시 서인의 실력자이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 동생, 그리고 숙종의 외삼촌이었던 김석주가 나서서 "남인 세력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한 것. 사실 이는 서인 입장에서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카드이기도 했다. 물론 앞서 말했 듯 남인과 숙종의 사이가 껄끄럽다는 것, 그리고 친정에 관여하려 했다는 것을 발판 삼아 던진다면 찍어 맞힐 확률이 높은 카드이긴 했다.
그러나 만약에,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남인 세력과 숙종 사이에 북벌과 군사 협력에 대한 물밑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는 반대로 '무고' 역풍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잔치를 준비하던 허적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유악[1]을 가져가자 숙종이 진노하여 남인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이들을 압박하기 시작한다.[2] 이 때 남인이 이 잔치 이전부터 역모를 벌이려 계획해 왔다는 말이 나오면서 환국이 벌어지고 만다.

4. 결말

관련된 왕족들과 역모 주동자로 지목된 허견을 비롯해 허적,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는데, 특히 윤휴는 사약까지 받고 말았다.

나름대로 이론 싸움으로 예의를 갖추며 싸우던 예송논쟁 시기와 달리 한 편이 완전히 갈려나가는 대대적인 숙청은 관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왔고, 이에 조선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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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기름을 바른 일종의 천막. 안 그래도 숙종은 허적에게 보내주려고 했지만, 이미 허적이 가져갔다는 말에 크게 분노하였다.
  • [2]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허적의 성향상 과연 저런 짓을 했을까 하는 지적이 있는 것. 실제로 실록에서는 그 기록이 없고, 어느날 갑자기 궤장을 통해 안심을 시키다가 바로 불시에 환국이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되어있다. 도리어 이 '유악'설이 이 황당한 정변을 설명하는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만화 등에서는 이를 지적하고 있다.

[출처]다음 백과사전

 

<사림>
[정의]
충청남도 논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유학자와 선비 세력에 대한 호칭.


[개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사림(士林)이란 고려시대에 유학자 또는 유학을 닦은 관료로 유사(儒士), 유신(儒臣) 등으로 불렸으며, 말기에 신유학이 들어오면서 사대부·사인·사류(士類)·사족(士族)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사림이란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이 용어는 성종대 이후의 신진 세력인 사림파와 관련해 성종대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이해되기 쉬우나, 조선 왕조 초기의 실록에도 적지 않은 용례가 확인된다.

사림의 주체와 내용, 성향 등이 성종~중종 연간에 두드러지게 된 것은 세조~성종 초에 공신이 다수 배출되면서부터이다. 스스로 일반 조사(朝士)와 구별하는 의식을 가진 가운데, 마침 조정 진출의 기회를 얻은 지방 출신의 신진 사류들이 공신들의 권귀화(權貴化)에 대한 비판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신진 사류들이 주장하였던 청론·청의(淸議)가 사림의 주체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신진 사류는 재야 선비들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호칭 역시 재야 선비들을 포괄하게 되었다.


[충청의 기호사림]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충청도, 그 이미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그 상징의 연원을 살피면, 조선시대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호학파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맥이 논산에 뿌리 내린 논산사림(호서사림)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의미와 역사성을 찾을 수 있다.


[호서학파와 학맥의 발전]
안향(安珦) 이후 권부(權溥)·백이정·이제현(李齊賢)을 거치면서 발전한 성리학은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에 와서 고려 성리학의 정점을 이루게 되었다. 정몽주는 문하에 길재(吉再)·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조용(趙庸) 등을 두었는데, 이중 길재가 정몽주의 도통을 이었다. 길재의 학문은 김숙자(金叔滋)에게 정통이 넘어갔으며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도통을 이었다. 김종직의 문인 중 김굉필(金宏弼)에게, 이후 조광조(趙光祖)에게 도통이 이어졌다.

한편 안향의 문인 중 주목되는 인물은 권부이다. 권근(權近)의 증조부이기도 한 권부는 초기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많은 연구자들이 권부를 백이정·우탁(禹倬)과 더불어 안향을 계승한 명유로 보고 있다. 권부의 제자로는 이곡(李穀)·이인복(李仁復)·백문보(白文寶) 등이 있는데, 이중 이곡이 권부의 정통을 받았으며, 이곡의 아들이 고려 말 명유 이색(李穡)이다.

권부의 문하생은 아니었지만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었고, 권부의 사위로서 학문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이제현의 학문이 이색에게로 전해졌다. 이렇게 볼 때, 이색은 가학(家學)으로서 아버지 이곡을 통해 권근의 학맥을 계승하였고, 직접적으로는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색의 문하생으로 이숭인(李崇仁)·길재·하륜(河崙)·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명유가 배출되었는데, 이중 성리학적 소양, 정치적 영향력, 후대의 평가 등을 고려하면 권근이 후대인들에 의해 이색 이후 기호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볼 때 기호사림의 연원은 이색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권근은 가계상으로는 기호 연원인 권부의 혈통을 받았으며,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색과 정몽주의 학문을 전수받았다. 이색의 셋째 아들인 이종선(李種善)이 권근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양가는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권근은 한때 동문이었던 정도전의 영향도 받아 학문적 성취는 스승을 능가할 정도였다. 고려 말 성리학은 권근에 의해 기반이 확립되었으며, 특히 저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은 권근 저서의 백미로 꼽히고 있으며, 거기에 나오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 영남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권근의 직계 문하에는 김반(金泮)·허조(許稠)·맹사성(孟思誠)·강회백(姜淮伯) 등이 있고, 권근의 동생인 권우(權遇)의 문인으로 안지(安止)·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가 있다. 그리고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의 문인 역시 관심의 대상이다. 세조와 성종대의 인물로 김반의 문인으로 최항(崔恒)과 이석형(李石亨)·신숙주(申叔舟) 등이 있고, 강회백의 손자로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 권제의 아들 권람(權擥), 권근의 외손 서거정(徐居正), 허조의 문인 이극배(李克培) 등이 권근의 학맥으로 볼 수 있다.

이들과 더불어 기호학맥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조광조이다. 조광조는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기호 출신이기 때문에 기호학파의 종사가 되기도 한다. 조광조를 독향한 경기도 양주의 도봉서원에 송시열(宋時烈)을 추배하고자 노론 측에서 집요하게 노력한 것도 사실은 기호사림의 전통이 조광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조광조의 학통은 이이(李珥)로 연결되었다.

기호학파는 이이·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등이 주류가 되어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이 논산의 김장생(金長生)이었다. 김장생 문하에서 약 300여 명,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약 200여 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일부는 양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한 인사도 있었다. 문하생 가운데 특출한 이는 송준길(宋浚吉)·송시열·유계(兪棨)·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 등 충청5현이다.

학파의 적통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면서 호서사림으로 발전하였는데, 학문적인 특성은 예학(禮學)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이해가 깊어져 이를 체계화하고 이론화함에 따라 현실적인 실천의 예는 이론의 예로 의식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김집의 적통이 회덕의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호서사림의 전성을 맞게 되었다. 당시 호서사림을 잇는 적통은 송시열이었지만 그와 함께 호서사림을 주도한 인물은 송준길이었다. 양송(兩宋)이 정계에 등장하여 활동하면서 기호학통의 정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성혼과 이이, 김장생의 문묘종사를 성공시켰는데, 학문의 연원이 되는 인사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곧바로 정치적 집권의 명분을 뒷받침하고 학문적 정통성을 공인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서학파는 김장생의 예학을 주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적통이 송시열로 이어지면서 주자 성리학을 고수하였고, 서인에서 분파된 노론이 득세하면서 호서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논산사림]
조선 중기 호서사림의 학맥은 논산 출신의 사계 김장생과 아들 김집의 학연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김장생은 아버지 김계휘(金繼輝)가 강학했던 정회당(靜會堂)과 자신이 세운 양성당(養性堂)에서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송시열·송준길·이유태·권시(權諰)·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신흠(申欽)·이경석(李景奭) 등이 있다. 기호사림에 버금가는 논산사림(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과 그로 인한 학통의 형성으로 상당히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김장생은 정암 조광조의 덕치, 퇴계 이황의 도학(道學), 율곡 이이의 학문, 우암 송시열의 의리와 더불어 ‘예학’으로 이른바 ‘조선조 오현(五賢)’으로 추앙받아 왔다. 뿐만 아니라, 김장생은 이이, 송익필의 적전(嫡傳)으로 기호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율곡학파의 문호가 넓어지고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논산사림을 대표하는 김장생에 의해서라고 할 것이다.


[기호사림의 정치적 갈등, 회니시비]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집권당인 서인 내에서 온건한 성향을 보였던 니산 출신의 윤증(尹拯, 소론)과 강경론을 주장하였던 회덕 출신의 송시열(노론)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대립을 일컫는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 속에서 시작된 당쟁은 결국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리되는 삼각관계의 구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러한 논쟁의 지역적 배경이 된 곳이 논산이다.

송시열과 윤증은 사제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친가·외가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고 대대로 먼 인척 관계를 유지하는 등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다. 즉 송시열과 윤증이 거주한 회덕과 니산(현 논산)은 같은 기호 지방이었고, 은진송씨와 파평윤씨는 당파도 함께 서인에 속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통혼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윤증은 송시열 문하의 수많은 제자들 중 유독 뛰어나다고 고제(高弟)로 지목되었으며, 송시열과 자신과는 가까운 인척인 특별한 관계를 생각해서 죽은 부친에 대한 묘갈명을 써달라고 유배지인 장기에 찾아가서 부탁할 정도였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은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 상의 결함을 지적한 「신유의서(辛酉擬書)」를 지었다. 동생 윤추(尹推)와 교우인 박세채(朴世采)가 만류하여 공개되지 않았으나, 송시열의 손자 송주석(宋疇錫)이 절취해 전달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에 송시열은 크게 노해 사제의 의를 끊어 버렸다. 송시열과 윤증은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 시 집권당인 서인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 윤증은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 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론]

 

소론(少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했으며, 노론과는 대립하는 파벌로서 윤증(尹拯)을 옳게 여기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북인이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소론에는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박태보·남구만·박세채 등 대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소장이 많다. [1]

 

형성[편집]

노론의 초대 영수송시열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상대적 보수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송시열을 비판하는 소론으로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소론의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으로 갈라졌다.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여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 이광사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와 이건창을 거쳐 정인보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1]

붕당의 발단[편집]

소론의 초대 영수 윤증

조선 후기에 서인으로부터 나누어진 당파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년(숙종 6)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 경신환국이라고도 함)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이 강·온 양 파로 분리되면서 발생했다. 즉,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을 강력히 탄압하자 소장층인 한태동(韓泰東)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소론이 남인의 탄압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만약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면 보복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한때 송시열의 제자이자 문인이었던 명재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절교하고 난 이후 양자 사이의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학문적 갈등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초기 노론의 영도자는 김익훈 · 송시열 등이었으며, 소론의 영도자는 조지겸(趙持謙) · 윤증 등이었다. 이후 당쟁은 주로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회니시비(懷尼是非)’라는 그 문제는 결국 노ㆍ소분당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윤증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이 촉발된 것은 44세 때인 1673년(현종 14)이었던 것이다.

세간에 알려졌듯이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송시열과 윤증이 살던 지명인 회덕(懷德, 지금 대전시 대덕구 일대)과 이성(尼城, 지금 충남 논산시 일대)에서 따온 명칭이다. 그 발단은 1673년 11월,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겨진 죽은 이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을 부탁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은 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그것은 윤휴(尹鑴, 1617~1680)를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찍이 윤휴가 주자의 주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했고, 윤휴와 친분을 유지하던 윤선거에게도 그와 절교할 것을 요구했다. 송시열의 증언에 따르면, 1665년(현종 6) 산사에서 만났을 때 “윤휴는 흑(黑)이고 음(陰)이며 소인(小人)”이라는 자신의 견해에 윤선거도 동조했다. 처음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려고 하자 지인들은 말렸다. 그러나 윤증은 “평소에 서로 의견이 다 맞지는 않았어도 부친의 마음은 늘 간격이 없으셨다”면서 강행했지만 판단은 결국 어긋났다.

윤증은 묘갈명을 의뢰하면서 참고 자료로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기유의서’(己酉擬書)를 보냈다. 그 편지는 송시열이 보기에 불편한 내용이었지만, 윤증은 아버지가 간절하게 책선(責善)한 뜻을 끝내 묻어버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기유의서’를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고, 윤휴가 윤선거의 영전에 제문을 보낸 사실을 보고는 절교의 진위를 의심했다. 송시열이 작성해 보낸 묘갈명에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생몰년과 관력을 간단히 적고 “나는 공에게 견주면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덕을 서술하는 글을 쓰려니 더욱 아득해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전제한 뒤 박세채의 행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진실한 현석(박세채의 호)이 참으로 잘 선양했기에 나는 따로 서술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이 묘갈명을 지었다(允矣玄石, 極其揄揚, 我述不作, 揭此銘章)”고 썼다.

윤증은 이러한 감정어린 묘갈명에 당혹했고, 그 뒤 거듭 송시열에게 개정을 부탁했지만(1676년〔숙종 2〕과 1678년)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것으로 그 대체가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완전히 확정하는 사건이 다시 한번 발생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의서’였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보내는 한 통의 편지를 썼던 것이다. 신유년에 작성했고 역시 보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유의서’(辛酉疑書) 라고 불리는 편지다.

1684년(숙종 10) 여름 최신(崔愼)이라는 인물이 신유의서를 근거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비판했고, 김수항ㆍ민정중 등 대신들도 윤증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송시열을 헐뜯었으니 다시는 유현을 대우하는 예의를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숙종은 윤허했다.

명재 윤증이 훗날 연보(명재연보)에 기록하기를 “이때부터 시의(時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위로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부터 아래로는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뜻을 받들고 눈치를 살펴 무리 지어 비난하고 헐뜯었다.”고 했다.

신유의서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윤증은 55세, 송시열은 77세였다. 이로써 당시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의 결별로 당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

[출처]위키백과

 

 

 

명재 윤증 고택 사랑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90호) 1

 

 

명재 윤증 고택 '안채, 사랑채(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

 

명재 윤증 고택 안채(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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