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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역사저널 그날(KBS1)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역사저널 그날(KBS1)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2015년 11월30일 월요일 '역사저널 그날(KBS1)'프로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에 관한 내용을 시청했는데, 재미있다.

 

12시30분~2시에 성경필사를 하며...22세에 요절한 효명세자와 83세까지 가장 장수한 왕후 신정왕후'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요점 정리를 해보았다...ㅎㅎ...

☞장수한 왕후~ 단종의 비(정순왕후)/혜경궁홍씨(사도세자비)/신정왕후(효명세자비) 등이 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 대리청정 3년3개월만에 별안간 각혈을 하기 시작하면서 22세에 요절했다.

효명세자 20세 때 어머니 순원왕후 40세 생일잔치를 위한 춤(춘앵무 등), 음악 등을 직접 작사 작곡 안무하여 창덕궁 연경당에서 공연을 했다...현재 전해지는 한국궁중무용의 절반을 효명세자가 창작하여 한국궁중무용계에서는 효명세자가 유명하다고 한다...

효명세자가 요절했을 때, 세자빈 풍양조씨(신정왕후)의 아들 헌종의 나이는 4세...8세에 헌종이 왕으로 즉위했다....헌종 즉위년 효명세자는 추존왕 익종이 된다... 

헌종의 수렴청정은 할머니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안동 김씨)가 했다...헌종이 23세에 승하하면서 강화도령 철종이 즉위했는데, 철종은 순조의 양자로 입적, 효명세자(익종)와 같은 항렬이 된다...철종 즉위 후 안동김씨에 의한 풍양조씨 탄압이 있었다고 한다...

철종이 재위 14년만에 33세로 후사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 조대비가 고종을 본인의 양자로 입적하여 고종이 12세에 왕으로 즉위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효명세자는 '익종'에서 '문조'로 추존

신정왕후의 정식시호는 무려 56자로 가장 길다...경기도 구리시 동구능의 수릉에 효명세자(익종)와 합장능...

 

-2015년 11월30일 월요일-

 

 

 

조대비 수절 60년, 세도정치에 칼을 겨누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순조 대.
이들의 독주에 제동을 건 이가 있었다.
바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하지만 효명세자는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22세의 나이로 단명하고 만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
효명세자의 아내, 신정왕후 조씨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오랜 세월 남편의 뜻을 가슴에 품어왔던 신정왕후.
마침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심장에
칼을 겨눈다!




■ 효명 세자부부의 엇갈린 운명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적장자로 태어나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효명세자.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9세의 나이에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에 나선다. 효명세자는 세자빈 가문인 풍양조씨와 함께 안동김씨를 견제한다. 안동김씨에 밀려 국정에서 소외되었던 인재를 등용하고 궁중무용을 정비해 왕실잔치를 통해 왕실권위를 높인다. 하지만 1830년,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둔다. 뜻을 채 펼치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둔 효명세자, 그로 인해 세자빈, 신정왕후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 홀로 남은 신정왕후, 가시밭을 걷다.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순조마저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른다. 8살 어린 나이의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것은 어머니 신정왕후가 아닌 시어머니, 순원왕후. 안동김씨는 순원왕후의 비호 아래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1834년, 헌종마저 23살 나이로 요절하자, 안동김씨는 본격적으로 신정왕후의 친정인 풍양조씨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남편에 이은 아들의 죽음. 설상가상으로 친정까지 위험에 빠진 신정왕후는 몸을 낮추고 인고의 나날을 보낸다.


 
 

 

■ 신정왕후, 권력의 중심에 서다.
1857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신정왕후는 비로소 왕실 최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6년 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한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신정왕후는 오랜 세월 국정을 농단한 안동김씨를 향해 일격을 가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기구인 비변사를 혁파한 것이다. 그리고 신정왕후는 남편 효명세자가 이루지 못한 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간다. 부정부패로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정비하고, 서얼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또, 조선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건하게 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남편의 뜻을 좇은 신정왕후, 그녀의 손끝에서 효명세자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그늘 속에 몰락해가던 19세기, 그 안에서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 부부. 2015년 7월 26일 KBS 1TV 밤 10시 30분, <역사저널 그날>에서 운명은 달랐지만 함께 시대적 모순에 저항했던 효명세자와 그의 아내, 신정왕후.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은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고종 4년(1867년)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경복궁에 지은 전각으로,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다시 지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

 

청연루 누마루는 높직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아 운치를 돋구었고, 후면에는 단(段)을 둔 쪽마루를 두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을 얹었다.

 

자경전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寢房)인 욱실을 둔 복안당(福安堂)은 겨울을 위한 공간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이다. 중앙부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2칸, 전·후 툇간의 자경전은 낮시간에 거처하던 공간이고, 동남부의 다락집 청연루(淸讌樓)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동쪽의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은 시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전면 마당 동·남·서쪽에는 각각 동행각·남행각·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좌측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우측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년)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자경전(慈慶殿)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讌樓)가 건축되었고,

연이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건축되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ㄴ자형을 이루고 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재건의 제2단계 조영(造營) 때 고종의 양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를 위하여

옛 자미당(紫薇堂) 터에 지은 연침(燕寢 :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 건물이다.

자경전은 대비전으로, 현재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연침 건물이라는 데에 그 역사적 건축사적 의미가 있다.

 

자경전 후원(後園) 북쪽 담과 이어진 굴뚝에는 왕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가 베풀어졌고,

서쪽 벽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상문자가 액자처럼 조성되어 있다.

 

 

보물 제810호. 자경전의 뒤뜰 샛담의 일부분을 굴뚝으로 만들고 뒷마당을 향하는 외벽 중앙부를 장방형으로 구획하였다.

그리고 여러 개의 벽돌로 십장생 무늬를 짜 맞춘 뒤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이 굴뚝은 담장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 위에 벽돌로 쌓았다.

벽면의 크기는 너비 381㎝, 높이 236㎝, 두께 65㎝이다.

 제일 아랫부분에는 좌우에 각각 벽사상(辟邪像)을 전(塼)으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그 위로(중앙부) 가로 303㎝, 세로 88㎝의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였다.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해·산·구름·바위·소나무·대나무·거북·사슴·학·연꽃·불로초 등을 제각기 다른 조형전(造形塼)으로 만들어 회벽에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 위로는 중앙에 용문전(龍文塼)을, 좌우에는 학문전(鶴文塼)을 끼웠는데 이 학들은 영지(靈芝)를 입에 물고 있다.

윗부분에는 소로[小累]·창방(昌枋)·첨차(檐遮)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그 위에 기와지붕을 이었다.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 : 굴뚝 위에 꾸밈으로 얹은 기와로 만든 지붕모양의 물건)를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이 굴뚝은 아미산(峨嵋山)의 굴뚝과 같은 유형의 무늬를 하였으나, 아미산의 굴뚝이 육면체로 화면을 구성한 데 비하여 장방형으로 처리하면서

넓은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약간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굴뚝이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장식적인 기능을 충실히 하였다.

그 조형미도 매우 세련되어 조선시대 궁궐에 있는 굴뚝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북행각에 이어져 있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굴뚝은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