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2016년 7월11일 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이고...오늘의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울림이 있는 글>
1. ‘지식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면서 얻어지는 것이고, 지혜는 나누고 비움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우고, 쌓으면서 얻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비우고, 나누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오늘은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이자 유럽의 수호자이신 사부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입니다.
“태양같은 생명으로 많은 후손 얻은 그는 아브라함과 같도다.
작은 굴에 있는 그를 까마귀의 복사로써 엘리야로 알리네.
강물에서 도끼 건진 성 분도를 엘리사 예언자로 알도다.
무죄 덕행 요셉같고, 장래일도 알아내니 야곱처럼 알도다.”
위에 열거된 모든 성인의 성덕을 합쳐 놓은 분과 같은 성 베네딕도라하니
성인께 대한 수도후배들의 흠모의 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참으로 완덕의 수도성인이었습니다.
저는 6세기의 성 베네딕도를 산같은 분이라면, 12세기의 성 프란치스코를 강같은 분으로 견주곤 합니다.
중용과 절제의 산같은 성 베네딕도라면 시인이자 신비가인 성 프란치스코는 강 같은 분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는 구절이 늘 신선한 충격이요 감동입니다.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에는 졸업이 없으니, 평생 섬기기를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1독서의 결론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물을 찾듯 그것을 찾는다면
그때에 너는 주님 경외함을 깨닫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리라.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시고 그분 입에서는 슬기가 나온다.”
사랑이 지혜이듯 섬김service이 지혜wisdom입니다.
섬기는 삶에 충실할 때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는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믿을만한 영성의 잣대도 섬김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섬김, 순종의 섬김, 겸손의 섬김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4.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평화의 주님이 아니라, 사실은 폭력의 주님이라는 말씀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바로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서 제거해야 하는 것을 과감하게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평화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내가 조금만 참으면 하는데 뭐...’라면서 꾹 참으면 이것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롭게 살자.”면서복잡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 큰 미덕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정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는 것,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참 평화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자신은 과연 평화로운지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한 상태를 평화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너 자신뿐이다.(에머슨)@@(빠다킹 신부)
5. "당신이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찬미)이다."라는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대로, 또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자신의 전 존재의 실존", 즉 삶(생활)으로 하느님을 찬미해 드려야 합니다.(이해욱 신부)
6. 생명을 얻는 길은 생명을 내놓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한걸음씩 생명을 증가시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는 몸짓을 통해서도 생명은 확산될 것입니다(10,42).
-제자들의 길은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역설적인 삶입니다. 남이 싫어하는 궂은 일 나서서 하기,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하기, 편리한 것들이 주어질 때도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며 불편을 감수하는 것 등이 예수님의 참 제자다운 삶의 면모들이겠지요.
-오늘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통해 참 평화 가운데 머물며, 사랑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며, 그분 때문에 가장 소중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건네는 ‘어리석은 역설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체스코 신부)
7. ‘가우셀모 레푸히오’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수많은 ‘순례자 숙소’(알베르게 Albergue) 중 하나입니다. 가우셀모는 돈을 목적으로 하는 숙소가 아닙니다. 순례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이곳의 운영은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성 야고보 형제회’(Confraternity of Saint James)라고 하는 ‘영어권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25년 동안 지금까지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미 산티아고 순례를 한 사람)이 와서 2주간씩 순례자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봉사자들(스페인어로 ‘Hospedaleros’)은 종교를 불문하고 영국, 미국, 스페인, 호주, 독일 등 전세계에서 자기 돈을 들여 ‘가우셀모’에 와서 순례자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이용하는 순례자들은 이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자기 시간을 내어 봉사자로 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갑니다. ‘감동’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의 힘으로 자신도 모르게 전염됩니다. 댓가 없는 사랑,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그냥 내어주는 사랑이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참다운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이웃이란 지금 여기 내 앞에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에게 전염되어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슨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나 사심이 들어가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상업적인 거래’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과연 ‘내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이웃인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
8. 올 해의 최고 유행어 중 하나가 영화 곡성에서 아역 배우가 했던 “뭣이 중헌디!”입니다. 영화의 흐름상 매우 중요한 대사지만 이 말이 유행을 타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 어떠한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허냐고?”라고 아빠에게 따져 묻다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라고 하며 나가버립니다
-아빠는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딸에게 주문을 거는 나쁜 사람을 처치하기 위해 동네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자신이 경찰임에도 범법 행위도 감행합니다. 그러나 어떤 힘에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힘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자신이 불렀던 무당의 힘도 믿지 못했습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딸이 매우 아파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굿판을 뒤집어엎습니다. 성당까지 찾아갔지만 그것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한 여인까지도 믿지 못하여 온 가족이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는 계속 “뭣이 중헌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아이를 살리기 위해 뭣이 중헌지 모르는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뭣이 중헌지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게 만듭니다.
- 오늘 산책하다가 작은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낚시꾼이 어떤 물고기를 잡아야하는지 잡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르고 있다면 정상일까요? 낚시하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선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의 이웃이고 그들이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의 피를 쏟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무엇이 중헌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 것들을 더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뭣이 중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장 “제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뭣이 중헌디!” 를 알아야겠습니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살아가는 인생은 불쌍합니다.
“뭣이 중허냐고?” 끊임없이 성부께 물어가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아멘.
- 2016년 7월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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