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2016-07-29-금 아침묵상 '성녀 마르타 기념일'] / 오색딱따구리 6장


[2016-07-29-금 아침묵상 '성녀 마르타 기념일']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복음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11,21) 이 말은 주님, 어디 계셨습니까? 왜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탄식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말합니다.

마르타의 탄식은 바로 그리스도교인들 곧, 나의 외침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과 외로움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많은 순간 나의 이런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나의 어려움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켜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버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11,24)라고 대답합니다. 마르타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속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이성으로 헤아리려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긴 했으나, ‘지금 여기서’ 죽음을 이기시는 분임을 온전히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앎’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마르타를 진정한 신앙으로 이끌어주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5-26)

참 신앙은 아는 것만으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믿고 사랑하기 위한 지식, 아는 것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성경과 교리 지식으로 예수님이 구세주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고 해도 믿지 않고, 믿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르타는 예수님의 이끄심으로 다시 낙관적인 신앙으로 돌아와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11,27) 앎과 믿음, 비통함과 소망 사이를 오가는 나 자신이 바로 또 다른 마르타가 아닐까요? 오가는 나날의 길목이 바로 신앙고백에로 초대입니다.

우리 모두 패배감과 실망, 좌절의 순간에도 마르타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며 영원 생명이요 희망이신 주님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16)

오늘도 일상의 삶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의 깊은 내적 일치를 이루고, 마르타처럼 앎과 믿음이 어우러지는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체스코 신부)


2. 내가 노아의 방주 안에 머무는지 아닌지는 바로 두려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방주 밖에 머무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 머뭅니다. 주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십니다.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하고 하루를 살다가도 어느 순간 누군가를 험담하고 있고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고 누군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왜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데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지도 않고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은 차에 기름도 채우지 않고 운전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주인으로 오시려고 하는데 이미 주인이 떡 버티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고 싶으셔도 머무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자아는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있다면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은 돌아가시게 됩니다. 자아는 그래서 교만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사랑이 내 안에 머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 즉 성령을 받고 당신의 사랑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온유하고 겸손해지려는 우리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합니다.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있는 한, 그래서 교만하고 고집만 가득한 사람으로 머무는 한 사랑은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나오지도 못하게 됩니다.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질 수 있는 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자의 의지입니다. 하루 종일 이 덕을 시험하고 갈고 닦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바로 계명이기 때문에 온유와 겸손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3.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첫 번째 기적을 갈릴레아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십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은 기쁨을 나타냅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바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둘이 만나서 한 가정이라고 하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평화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기적을 주실 때가 언제냐?

기쁨이 있을 때 기적을 주십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다른 이가 기뻐할 때 기뻐해야 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해야 되고~~

없는 자와 어울릴 때는 그들처럼 살아야 되고~~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아이처럼 단순해야 하고~~

노래해야 할 때는 노래해야 하고~~

춤 춰야 할 때는 춤을 춰야 합니다.

술을 마실 때는 같이 술을 마시는 따스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춤춰야 할 때 같이 춤을 추셨고 술 마실 때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애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세상에게... 사방에게....

열려 있어야 됩니다.

 

한 영혼을 구하려면 밝고 명랑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경거망동하고 허풍을 떠는 수다쟁이가 되라는 그 뜻은 아닐 겁니다.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단죄하지 않으셨고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셨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셨습니다.

이런 멋쟁이가 신앙의 프로들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고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은 비천한 갈릴리의 젊은 남녀를 수치와 경멸에서 구하기 위해 당신의 첫 번째 능력을 쓰신 겁니다.

이기적으로 이해 타산적으로 자기 탤런트를 쓰기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탤런트를 쓰셨습니다.


이 가나안 기적은 술의 기적이 아니라

첫 번째,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때 생기는 기적이요!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기적이요!

성모님처럼 무조건 예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기적임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내가 노아의 방주 안에 머무는지 아닌지는 바로 두려움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방주 밖에 머무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 머뭅니다.

주님은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십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이 없는 행동을 하였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다른 이가 기뻐할 때 기뻐해야 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해야 되고~~

없는 자와 어울릴 때는 그들처럼 살아야 되고~~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아이처럼 단순해야 하고~~

노래해야 할 때는 노래해야 하고~~

춤 춰야 할 때는 춤을 춰야 합니다.

술을 마실 때는 같이 술을 마시는 따스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춤춰야 할 때 같이 춤을 추셨고 술 마실 때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애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세상에게... 사방에게....

열려 있어야 됩니다.

 

한 영혼을 구하려면 밝고 명랑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경거망동하고 허풍을 떠는 수다쟁이가 되라는 그 뜻은 아닐 겁니다.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단죄하지 않으셨고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셨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셨습니다.

이런 멋쟁이가 신앙의 프로들입니다.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는...

멋쟁이 신앙의 프로가 되도록...

의지를 가지고...노력하게 하소서.

아멘.


- 2016년 7월29일 금요일...성녀 마르타 기념일...수산나 - 



오색딱따구리 1


오색딱따구리 2


오색딱따구리 3


오색딱따구리 4


오색딱따구리 5


오색딱따구리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