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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07-30-토 아침묵상 복음 <세례자 요한의 죽음>]/왜가리 5장


[2016-07-30-토 아침묵상 ]


제1독서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1-16.24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굿뉴스-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우리가 깊이 새겨할 할 점은 온갖 불의와 억압, 거짓과 폭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주님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귀를 기울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의 음성을 따르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여러분의 마음에 온전히 간직하시고, 그분의 권고를 정신을 다하여 이행하십시오.”(형제회 편지 7절)

사실 자신의 힘을 믿고 거기에 기대어 자기 뜻을 이루려 하는 이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의지하는 현세 재물과 인간적인 능력들은 늘 제한적이기에 그 자체로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게 살면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양심이 무뎌지게 되지요.

오늘도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소리에 충실히 응답하며, 주님께 의지하여 죄악을 폭로시키는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 정의가 뒤따르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체스코 신부)


2. * 묵상은 성서 말씀의 여러 가지 내용이나 장면들이 자기 삶의 구체적인 문제와 연결되지 

  않으면 묵상을 했다라고 할 수 없는 거죠. 그냥 상상의 나래만 폈을 뿐인거죠. 


마치 대화를 하듯이. 그냥 성서를 폈을 뿐인데 거기에 부제님의 문제, 고민들이, 저도 항상 그런 고민 속에 같

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거죠. 아마 부제님이 더더욱 기도하고 그랬기 때문에 저보

다 더 분명하게 말씀을 받는 그런 체험을 한 것 같애요. 그러면서 저게 바로 묵상을 제대로 한 

거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그런데 미사는 뭐냐?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억지로 가서 제사 바치는 게 아니

  라 알기 때문에 나오는 너무나도 자발적인 섬김이라는 거죠. 영어로는 서비스라고도 하고

  이렇습니다. 그래서 아무튼 전통의식이 중요하구요,


* 고통에 대한 교육적 시각을 제시한 구약성경 욥기와 신약성경의 시각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

  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정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없애러 오신 분

  이 아니라 그 어떤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 고

  통을 넘어서는 구원(부활)으로 기끄신다는 종말론적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

  문이다.


야훼의 종이라는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 보면요 형체가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표

현이 나와요. 그런 모습으로까지 온통 모든 걸 주면서 이 사람들을 지켜내는 게 십자가 사건이

라는 거죠. 보통 십자가 이러면 고통 이렇게만 생각하시는데요. 신학적인 정의에 의하면 사랑

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절정.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주는 거예요.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 왜? 그걸 통해서 나는 구원된 상태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고, 또 저희가 소록도를 저희 학사님들과 갔는데 그대 이야기였습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아픔이 다가오면 더 예뻐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여기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 되는 거니까. 

[김혜윤 수녀님 성경 여행 스케치 / 제19회 그리스도교의 메시아관 ]


3.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는 예언자는 없습니다.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눈이 맑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기득권자들이 아닌 민중, 혹은 일반 신자들의 요구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요셉신부)


4. 문득 밀과 가라지의 선과 악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밀속의 가라지가 아니라 가라지 속의 밀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의 세력에 선의 세력이 너무 미약해 보입니다. 


끊임없이 선을 가꾸고 돌보는 수행의 노력이 없으면 악속에서 선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교훈을 줍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대한 복음을 읽을 때면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오늘은 ‘무지의 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로 인해 자기를 몰라 교만이요 탐욕이요 본의 아니게 악의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수행의 노력이 없이는 인간의 야수성, 잔인성, 공격성을 통제하기는 극히 힘듭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총을 당연히 전제로 합니다. 


악마의 도구가 되기 십중팔구의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알게 하는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 지 깨닫습니다. 

도대체 악뿐이 보고 배운 것이 없는 환경의 무지의 사람들이라면 참 대안이나 대책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의 무지를 일깨우다 순교한 세례자 요한처럼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백성들의 무지를 일깨우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났지만 악의 세력은 호시탐탐 여전히 건재합니다. 

결국은 사람이요, 각성覺醒을 통해 무지의 악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우리의 나이테는 독특하며, 주변의 다른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직립보행이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두뇌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야가 더 높아지고, 우리의 성대는 더 많은 소리를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언어라는 나이테는 나약한 우리를 하나로 연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족,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자라는 나이테는 우리의 지식을 통합하게 해 주었습니다. 문자는 사자의 이빨보다, 곰의 발보다, 독수리의 눈보다, 치타의 다리보다 강한 힘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해서 역사, 문화, 신화,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었습니다. 의미라는 나이테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원한 세상을 갈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은 허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대면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동굴 속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은 진리가 보여주는 여명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굴 밖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듯이, 우리의 삶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에 시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신화, 종교, 철학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성숙한 인간의 나이테를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의 나이테를 말하였습니다. 학문을 배우고, 뜻을 세우고, 의혹이 없으며, 하늘의 뜻을 따르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 어떤 일을 해도 그르침이 없는 삶입니다.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아직은 세상이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유혹이라는 바람 앞에 늘 흔들리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자 요한을 죽게 하였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하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나이테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삶에로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였습니다.


7월의 끝자락입니다.

내 삶의 나이테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이나 그의 목을 베어 버린 사건과  배경, 곁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간의 비열한 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겨 내고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할 새로운 예언자들입니다.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는 예언자는 없습니다.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고 그래서 눈이 맑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은 잃을 것이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들도 기득권자들이 아닌 민중, 혹은 일반 신자들의 요구를 존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야훼의 종이라는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 보면요 형체가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런 모습으로까지 온통 모든 걸 주면서 이 사람들을 지켜내는 게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죠.

보통 십자가 이러면 고통 이렇게만 생각하시는데요.

신학적인 정의에 의하면 사랑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절정.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주는 거예요. 


우리가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

왜? 그걸 통해서 나는 구원된 상태로 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아픔이 다가오면 더 예뻐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여기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 되는 거니까....


두려움, 불안으로 적그리스도(악령)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길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였나이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할 때 적그리스도(악령)가 저를 사로잡는 줄 알았나이다.


나의 예수님, 나의 하느님, 나의 성령님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불안해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 저를 사로잡아

적그리스도(악령)가 활동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당신의 자비로 날마다 인도하소서.

아멘.




- 2016년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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