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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년 10월4일 화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우리들의 묵상 / 밤나무 5장


2016년 10월4일 화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우리들의 묵상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이고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가 예수님께 동생인 마리아더러 언니를 도우라고 일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1,13-24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오늘의 묵상

모든 종교적 삶의 목표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무명(無明)한 인간이 참된 진리에 눈을 뜨는 ‘회심’의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깨달음을 얻고 회심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박해하며 유다교의 전통을 지켰지만, 참된 진리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된 보편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따로 뽑으셨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까지도 당신 섭리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도 비슷했습니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에 매달리던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순간, 헛된 욕망을 버리고 완전한 가난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삶에로의 부르심을 깨닫고, 무너져 가던 교회를 청빈의 정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을 집에 모신 마르타의 분주한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가 찾은 참된 기쁨의 몫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평가하려던 마르타의 편견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마르타나 마리아 둘 다 주님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자캐오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빌린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사람과 가족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행동이 바뀐 사람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도 나와 성격이 다를 수 있고, 직장에서, 이웃에서도 그렇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지내기 어렵습니다. 본당에도 그렇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단체들은 서로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단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배격한다면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단체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협조할 때 공동체는 발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선택을 존중해 주셨습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낮추고, 비우고, 작아짐으로써’, 가난하게 되셨음을 알아차린 프란치스코는 바로 그 가난을 통해 사랑의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형제회 편지 29).

사랑하는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그는 가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난은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통로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것이지, 가난해지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걸었던 가난의 길, 사랑의 길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되돌리는 되돌림의 길이었습니다.

성인이 살았던 가난의 역설은 그래서 아래로의 발걸음이요 비움의 길이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도 작아지는 사랑의 순례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형제로서 “서로 간에 어떤 권한이나 지배권도 가져서는 안 되며, 서로 봉사자와 종이 되어야 하며, 영의 사랑으로 자진해서 봉사하라.”(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5,9-14)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9,2) 그는 이렇게 가난의 역설을 통하여 가난하신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으며, 피조물을 사랑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온 몸으로 실행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자 되어 주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마태 11,30) 행복한 사랑의 순례를 했던 아씨시의 빈자(貧者)를 본받아, 모두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풍요 안에 머물러 '모든 이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3. 하느님의 존재는 믿지만 그분의 자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담이 잎으로 몸을 가리려고 한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아드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자비를 입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거짓복음이란 바로 할례와 같은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만 한다는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믿음을 통한 성령의 부어지심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나서 지금은 다시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복음을 믿게 된 갈라티아인들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많은 신자들도 하느님이 율법을 잘 지키면 사랑하시고 잘 지키지 못하는 벌을 주시는 분으로 그런 잘못된 복음을 믿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는 것만으로 멈추어서는 안 되고 그분이 무한한 사랑 자체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미사를 열심히 참여하여, 묵주기도를 많이 하여, 선행을 많이 하여 주님께로부터 더 사랑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짓복음을 조심합시다. 우리 구원은 우리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그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고 절대 쫓아내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2016년 10월4일 화요일 [(백)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늘의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심’의 본질이고, 이 회심은 ‘멈추어 듣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마리아가 먼저 깨달았을 뿐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뀐 사람은 행동이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이 바뀐 사람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합니다.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인준받은 수도규칙 9,2)

 그는 이렇게 가난의 역설을 통하여 가난하신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었으며,

피조물을 사랑하는 보편적 형제애를 온 몸으로 실행했습니다.


우리도 가난한 자 되어 주님의 편한 멍에를 메고(마태 11,30) 행복한 사랑의 순례를 했던 아씨시의 빈자(貧者)를 본받아,

모두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풍요 안에 머물러 '모든 이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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