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20일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우리들의 묵상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왔고,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며 한 집안 식구끼리 갈라져 맞서리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3,14-21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오늘의 묵상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위험한 기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른다는 것은,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으로 ‘기억’해 내는 것이고, 이는 타성에 물든 내 옛 삶을 변화시키는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개인의 회심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가치들로 물들어 있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동의 기억들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한 내용을 서로 이야기하게 되고, 함께 공감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쳐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기억’을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영신수련을 하면 ‘두개의 깃발’을 묵상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 끝은 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은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느 깃발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식별’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느 깃발아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습관 중에 좋은 것은 계속 이어가고, 나쁜 것들은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자연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수풀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며 겨울이면 잠시 죽은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여지없이 이전의 모습을 다시 찾습니다. 닭이 독수리가 되겠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사과나무가 혹시 자기에게서 배가 열리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은 그저 강요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자신이 받은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본성은 강요해서 드러나는 무엇이 아닙니다. 개는 개의 본성대로 살고 감나무는 감나무의 본성대로 감을 열매로 맺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대로 사는 자연의 힘은 그 얼마나 강력합니다. 세상 어떤 힘도 아침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하느님의 본성대로 살지 못합니다.
반면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그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하느님이 자녀이고 그리스도와 한 본성을 소유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오시게 되면 성령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용솟음치게 하시어 더 이상 미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억지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이고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용솟음쳐 인간의 힘으로는 그 사랑을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의 에너지가 우리 내적 인간 안에서 용솟음칠 때 우리 안에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 안에 뿌리내린 그리스도로부터 용솟음치는 사랑의 힘이 충만하기를 빈다고 말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솟아날 수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품게 된다면 얼마나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전삼용 요셉신부)
3.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겪으실 고난의 사건 앞에서 괴로워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12,49. 51) 하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타오르길 바라시는 불은 무엇일까요? ‘불’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세상이 겪을 세말 심판을 뜻합니다(12,49).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께서 괴로워하시며 심판을 언급하시는 것은 간절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회개의 촉구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0월20일 [(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믿음은 도전입니다. 이제까지 확신하고 살아온 세속적 가치들에 맞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에 대한 선택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겸허함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식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의 양보다 내가 모르고 살아온 하느님의 지혜의 엄청난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는 회심입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아집과 편견에 대한 도전이고, 동시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때로 세상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는 위험에 빠뜨리시고,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 안의 모순과 싸워 회심을 일으키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대조된 사회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진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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