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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년 11월19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융건릉 개비자나무 5장


2016년 11월19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주님의 두 증인이 죽었다가 사흘 반이 지나 하느님의 숨을 받아 일어나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제1독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후사가 없이 죽은 일곱 형제 이야기를 들자 예수님께서는 저 세상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오늘의 묵상

우리는 오감을 통해서 세상을 체험하고 터득해 갑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서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만, 그 체험을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 인간들은 동물들과 달라서,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도 독서나 학습 등의 간접 체험을 통해서 익혀 나가고, 이 간접 체험은 우리 삶의 질적 차원을 완전히 상승시켜 놓았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독서와 학습을 통해서는 세상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신앙을 통해서는 부활과 하느님의 나라라는 초월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 나라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간접 체험을 통한 삶의 질적 상승과는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차원의 새 삶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주님 말씀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벽이 문으로 변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사두가이들의 벽을 활짝 열어 젖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흡사 죽음의 벽이 생명의 문, 부활의 문으로 활짝 열린 느낌입니다. 이미 부활의 문을 통과하여 부활을 앞당겨 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죽은 이들의 벽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문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삶이 천사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천사와 같은 삶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니 현세 물질이나 돈,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안달복달하지 않게 되지요. 부활의 삶은 어떤 처지에서도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가난하지만 영원히 풍요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있음을 자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며,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포기하고 고통을 견디어내는 일상의 죽음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영원성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 되시며,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겠지요.

오늘도 ‘사랑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이런 믿음 속에 현세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1월19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질문은 역시 이 현세의 삶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면, 짝을 만나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는데,

이 복잡한 인연의 고리가 저세상에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예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삶과 죽음, 인연과 악연 등의 고통이 없는 온전한 기쁨의 세계입니다.

 단순히 지상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은 그리 큰 감동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초대받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삶이 천사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천사와 같은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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