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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년 12월5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매일미사 묵상 /비술나무 6장


2016년 12월5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귀여겨들으시고,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위대한 신비를 저희가 깨끗하고 정성된 마음으로 경축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오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니,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중풍에 걸린 이를 고쳐 주시어,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5,1-10

복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26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시기는커녕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고, 이를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분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라 생각했습니다. 중한 병에 걸린 것은 그만큼 죄가 크기 때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는 누가 용서해 줍니까? 율법 교사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도 잘 모르는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시니, 도저히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병자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병이 치유된 것은 그 병자가 일어나 걸음으로써 증명이 되지요.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먼저 고쳐 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의 죄까지도 씻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위가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임을 이 세상 곳곳에 널리 전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2. 오늘 복음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아픈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웃들은 아픈 사람의 처지를 알았습니다. 들것을 마련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붕을 들어내고, 아픈 사람을 예수님과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사랑과 연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규정과 절차를 이야기 합니다. 법적인 잣대를 이유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를 따지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이웃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을 사랑하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규정과 절차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법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이 있었고, 예수님을 믿고 함께 해준 이웃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이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면 좋겠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군중 때문에 예수님 곁에 이를 수 없자 중풍병자의 동료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냅니다.  그대로 동료들의 간절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개인의 믿음은 약하지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즉시 떠오르는 미사중 ‘영성체 예식’ 부분의 ‘평화 예식’에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교회의 믿음을 통해 용서받는 우리의 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하나 교회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물론 이에 앞서 전제되는 바 우리의 회개입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아마 중풍병자는 동료들의 믿음에 감동하여 깊이 회개하며 믿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한 죄의 용서로 ‘영혼의 치유’에 이어 뒤따르는 ‘육신의 치유’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주님을 만남으로 영육靈肉의 전인적全人的 치유의 구원을 받은 중풍병자입니다. 


치유받은 후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풍병자는 그대로 미사중 믿음으로 치유받은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치유 사건에 놀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주님의 치유에 대한 본능적 감사의 고백이 하느님 찬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 모두 찬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4. 예수님 시절에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유대교는 율법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절대적 기준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사람은 의인도 되고 죄인도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하느님이 죄에 대한 대가로 병고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

그와 반대로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느님은 용서하시지만 사람들이 오히려 인간을 죄인으로 단죄하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모습과 용서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 안에서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몸소 사람들을 섬기고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도 살리고 용서하는 노력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


우리가 용서하는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한 번 웃어주는 것,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 애정스런 하나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표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덕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애덕의 실천은 소홀히 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애덕 실천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우리 마음 안에 미움을 없애고 용서를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다가가고 그들의 실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 안에서 애덕의 삶이 무너지고 다른 이들로부터 분리됨을 느끼게 된다면 평화와 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용서의 삶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가장 훌륭한 분은 성모님입니다. 당신 아들의 부당한 죽음에도 묵묵히 침묵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의 덕을 갖추기 위하여 성모님께 매어 달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안에서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데 부족한 덕을 키워나가는데 필요한 투쟁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삶을 묵상하며 당신께서 우리에게 용서의 삶을 가르쳐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김태형 요한 세례자 신부)

5. 모든 관계는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끝입니다. 처음엔 상대에 비해 내가 보잘 것 없어 고마운 마음이 들지만 살다보면 상대에게 이것저것 변화를 요구하며 자신에게 맞춰줘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상대에게 무엇을 요구하게 된다면 자신을 상대보다 높은 위치에 놓는 것이고 상대 때문에 자신이 손해보고 있으니 좀 더 노력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끄러운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야합니다. 그래서 멸시받고 천대 받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만약 영화에서 남편이 나 조금씩 당신에게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 미안해. 내가 더 사랑하도록 노력할게.”라는 고백만 있었어도 사태가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내 가장 비참한 치부까지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참 기쁨과 평화를 얻기까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치유 이야기에서도 자유와 참 행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 치유 받게 하려는 이들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숙명론자나 운명론자들과는 달리 기와를 벗겨내고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내어 치유 받게 했습니다(5,19).

자유와 참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체념이나 불신이 아닌 진지한 믿음과 사랑의 인내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야말로 어떤 인간 권력보다도 깊고 힘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그 믿음을 지녀야겠습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나날의 순간이 바로 ‘신기한 일’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불신과 자신들의 신념과 고정된 습관,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들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후안무치, 약자능멸, 금전만능이라는 몰상식의 덫에 걸려 사익을 추구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며 사는 가련한 권력가들과 자본가들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고정된 틀과 의식들에서 벗어나 자유와 참 생명을 맞아들이기 위해,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지붕 위’곧 하느님께로 눈과 마음을 향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게 하고 내 영혼을 흐리게 하는 수많은 현실의 걸림돌 저 너머, 저 위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와 선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의 ‘한가운데로’ 내려와, 참 자유와 해방을 품고 “일어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야겠습니다.”(5,24)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끝없는 기쁨' 안에 머물기 위하여 온갖 굴레와 족쇄를 벗어던져버리고 참 자유와 행복을 나누고 선포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5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중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 치유 받게 하려는 이들은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체념하거나 포기해버리는 숙명론자나 운명론자들과는 달리 기와를 벗겨내고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내어 치유 받게 했습니다(5,19).

자유와 참 행복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체념이나 불신이 아닌 진지한 믿음과 사랑의 인내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나날의 순간이 바로 ‘신기한 일’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16년 12월5일 [(자) 대림 제2주간 월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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