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6일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하는 주님의 말씀을 예루살렘에게 전하며, 광야에 길을 닦고 사막에 길을 곧게 내라고 외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듯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0,1-11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2-14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예화를 드시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까지도 모두 품어 주기를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 중 하나가 이른바 왕따일 것입니다.
비단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알게 모르게 따돌림당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행위에 동참할 때가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특정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거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 그런 소문을 본의 아니게 퍼뜨리는 경우마저 있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 떠다니는 이야기 중, 진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어느 특정인을 소외시키는 일에 동참할 때가 있습니다. 아울러 그가 옳은 줄 알면서도 나의 편리함이나 집단의 암묵적인 강요에 못 이겨, 그를 소외시키는 일에 동참할 때마저 있지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농간으로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흥분하여 소리 지를 때,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 없음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대림 시기는 다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본의 아니게 무시하거나 소외시킨 이들이 있지나 않은지, 만일 소외시켰다면 나의 마음 안에 있는 어떤 요소가 그런 일을 허용했는지, 이 점에 대해 성찰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나는 대체 어떨 때 기뻐하는가?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기뻐하는가? 내 자신의 의지와 희망이 꺾일 때도 기뻐하는가? 혹 내 곁에서 힘들어 하는 작은 형제 하나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노고 바치기를 기뻐하는가? 진정,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나의 기쁨을 두고 살아가는가?(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골치덩이일수록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좌절하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이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하는 도구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살다 보면 내가 길 잃은 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지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가 바로 나 일수도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 사람은 나에게 더 큰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줍니다. 되찾은 양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마음이 가득한 곳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때론 내가 바로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번 더 때리랬다.”는 옛 말을 기억하며 더 큰 사랑의 요구를 일깨웁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3. 프란치스코 성인 말마따나 스프 한 숟가락을 떠먹은 행동은 죄가 아닙니다. 그저 실수일 뿐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스승님을 모시고 단체로 40일 간 금식을 하였다는 자긍심이 한 사람 때문에 무참히 깨졌다는 점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들의 눈길 속에는 그를 단죄하여 손상된 자긍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하는 욕심이 담겼습니다. 결국은 자기들 욕심을 만족시키려고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그를 단죄한 셈입니다. 죄가 아니었음에도 자기들 편의에 따라 죄로 만들어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기에 앞서 사랑이 우선한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행동과 말씀은 양떼를 보살피는 목자의 본보기입니다. 시비선악을 가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쾌도난마처럼 해결될 일이 전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제2의 시비선악 문제를 일으키는 단초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고발한 사람들은 예수가 율법에 따라 단죄하는 모습을 보고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번에 걸쳐 땅에다 무엇인가 쓰시고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역으로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의외의 행동은 정의를 판단하시되 사랑을 우선한 행동이며, 용서를 베풀되 정의를 훼손하지 않은 복층적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정의를 생각하되 사랑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윤경재 요셉)
3. 대림시기입니다.
우리는 대림시기에 3가지를 묵상합니다.
첫째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둘째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생각하고 바른 길을 가고자 노력합니다.
셋째는 지존하신 주님께서 "성체"의 모습으로 현존하심을 묵상합니다. 그 거룩하신 분께서 저렇게 작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먼 옛날에 오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모시기에 우리는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그래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
참 아름다운 섬이 그래도입니다.
언제나 낙관적 절대 긍정의 삶이 그래도 섬같은 삶입니다.
그래도 섬같은 착한목자 하느님이십니다.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그래도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못나도 그래도 우리를 찾아 오시는 착한목자 하느님이십니다.
착한목자 하느님의 세 면모를 배우고 싶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는 착한 목자 주님이십니다.
둘째, 말씀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나될수록 정체성 또렷한 참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앎으로 무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나되는 수행뿐입니다.
셋째, ‘작은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와같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 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존재감이 미미해 보이는 작은 이들에 대한 무시나 멸시나 차별이 얼마나 큰 대죄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큰 죄가 자포자기의 절망이며 작은 이들에 대한 무시입니다.
어찌보면 하느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작은 이들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은총의 대림시기,
그래도 작은 이들인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착한목자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운 ‘그래도’ 섬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시기이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삶을 찾아나서는 자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평소에 버리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이 길 잃은 어린양을 찾고 계시는 참목자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 하는 모습입니다.
(김태형 요한 세례자 신부)
6. 이사야의 위로의 책(40-50장)은 기쁨의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이 말씀에는 서둘러 내 백성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다시 숨 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는 유배 생활을 하고 있는 백성이 실제로 해방되리라는 하느님의 위로를 선포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하러 오시어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실 것입니다.”(40,11)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비유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마음을 쓰고 눈여겨보시며 아껴주시는 인격적 사랑입니다. 우리의 하찮고 속 좁은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신분, 나이, 성별, 학식, 지위, 재산 그 어떤 것도 사랑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큰 죄 중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에게 먼저 눈길을 돌리는 사랑입니다. 목자는 문제없는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향하고 먼저 선택하는 것이지요. 이 눈길은 ‘모두’가 행복한 사랑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보편적인 사랑이요 어머니다운 사랑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6일 [(자)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키워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정의를 생각하되 사랑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못나도 그래도 우리를 찾아 오시는 착한목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래도 섬같은 착한목자 하느님이십니다.
언제나 낙관적 절대 긍정의 삶이 그래도 섬같은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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