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10일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히시어, 밤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시고, 외아드님께서 오실 때에 저희가 빛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게 하시나이다. 아멘.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불처럼 일어섰던 엘리야 예언자를 칭송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말씀하시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엘리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이 이교도들이 믿는 바알 신을 숭배하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 정상에서 이교 신을 믿는 850명의 예언자와 대결하여 통쾌하게 승리합니다. 그 결과 아합 왕이 회개하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또 다른 메시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또한,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2열왕 2,9-11 참조). 따라서 엘리야가 메시아로서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800년이 지나,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기에 엘리야 예언자를 떠오르게 하였지요(2열왕 1,3-8 참조).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참수당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건부 신앙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요구 사항만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이 점을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예수께서는 영광만을 생각하는 유다인에게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이사 53,3~4)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 스토리에 열광합니다. 실패를 죄악시하고 성공을 찬양합니다. 그러기에 성공 스토리 이면에 숨은 험난한 과정을 소홀히 합니다. 심지어 목적을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부려도 된다는 오류를 범합니다.
가장 심각한 잘못이 바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양심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과 정의의 기준점을 자기들 임의대로 옮겨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익명의 제2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자기네들보다 월등한 문명을 자랑하던 바빌론 강가에서 주님의 땅 시온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기 민족을 이곳에 끌고 오신 고난의 이유를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님께서 이 고통 속에서 건져내실 터인데 그전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고난을 견디며 속죄 제물의 역할을 하면 후손에게서 주님의 뜻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처음으로 세상 밖 구경을 하고 시야가 확 트인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읽으려고 했던 익명의 이사야는 인류 정신사에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사야 덕분에 사고의 전환이 유다인 공동체로 번졌습니다. 유다이즘은 이제 한 민족의 신앙 틀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의미를 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유배기간에 엄청난 저술 활동이 이루어졌고, 여러 예언자들이 나와 상처 받은 민족을 위로하였습니다. 창조 신화와 원죄 이야기가 체계화하였으며 모세오경이 정립되었습니다. 개인적 욕심에 빠지기 쉬운 정치가들이 몰락하고 참된 예언자와 사상가들이 나오자 야훼 신앙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윤경재 요셉)
2.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입니다. 내용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주어만 바꾸면 다양한 내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친구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친구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해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뜻도 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는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우리는 대림시기의 첫째 주에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깨어 기다려야 함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주에는 깨어 기다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의 자세, 즉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셋째 주가 되면 주님께서 오실 때가 다가왔음을 기뻐해야 함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주가 되면 주님의 탄생이 예고되고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듣게 됩니다. 기다림의 시기, 이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가 바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는 선지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유대교는 전통상 말라키서 3장 23절의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앞서 와서 백성들을 한데 모으고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선지자로 내세우시며 이미 엘리야가 당신의 앞길을 닦으셨지만 핍박 받았음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여 고난을 받으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그 당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서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강병규 야고보 신부)
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오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변모와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면서, 메시아가 오기 전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을 생각하고 그분께 여쭙습니다(17,10).
제자들이 이런 율법학자들의 생각에 대해 묻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고 하십니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자신이 만들어낸 메시아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그 결말은 죽음뿐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우리 모두 현세를 관통하고 세상을 정화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예민하고 깨끗한 영의 눈을 뜨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만의 사고의 틀과 탐욕적인 시선을 거두고, 신앙을 통해 나만의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웃 사랑과 공동선을 먼저 추구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도 선행도 정의마저도 자기 식대로 하려는 버릇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눈을 뜨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신념의 허상과 왜곡된 사고의 틀, 속화된 욕망의 흐름에 매여, 구원의 선물을 제멋대로 다루는 불행한 우리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자신을 살피는 거룩한 자기 돌봄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10일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영광만을 생각하는 유다인에게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에 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이사 53,3~4)
이사야 덕분에 사고의 전환이 유다인 공동체로 번졌습니다.
유다이즘은 이제 한 민족의 신앙 틀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의미를 태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유배기간에 창조 신화와 원죄 이야기가 체계화하였으며 모세오경이 정립되었습니다.
개인적 욕심에 빠지기 쉬운 정치가들이 몰락하고 참된 예언자와 사상가들이 나오자 야훼 신앙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율법학자들의 생각에 대해 묻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고 하십니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자신이 만들어낸 메시아가 아니면 알아보지 못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현세를 관통하고 세상을 정화하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예민하고 깨끗한 영의 눈을 뜨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만의 사고의 틀과 탐욕적인 시선을 거두고,
신앙을 통해 나만의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웃 사랑과 공동선을 먼저 추구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도 선행도 정의마저도 자기 식대로 하려는 버릇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눈을 뜨고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신념의 허상과 왜곡된 사고의 틀, 속화된 욕망의 흐름에 매여,
구원의 선물을 제멋대로 다루는 불행한 우리가 되지 않도록,
깨어 자신을 살피는 거룩한 자기 돌봄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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