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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6년 12월9일[(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 /삼나무 5장


2016년 12월9일[(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다시 오실 외아드님을 깨어 기다리오니, 구세주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저희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있다가 그분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가 함깨 하시나이다.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신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평화가 강물처럼 넘실거렸으리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보고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탓하신다(복음).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8,17-19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에 참여한 저희를 생명의 양식으로 기르시니, 저희가 지상 것을 슬기롭게 헤아리며, 끊임없이 천상 것을 찾도록 가르쳐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탓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경건하게 단식하면 자기를 드러내려고 단식한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단식을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인 행위를 묘사하신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촉구했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식사마저도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반대자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신 것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보고도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요. 또한, 어떤 일을 하기 전과, 그 일을 한 뒤의 마음가짐이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신뢰심과 굳센 믿음을 지니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심을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어 잔치에 참여하신 것은 무한한 용서의 행동입니다. 그 효과가 전 인류에게 오래도록 미쳤습니다.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잠시 작은 나라에 영향을 끼쳤던 초 장왕의 배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생명을 구하였고 그 혜택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혜는 행동하는 지식입니다. 머리에 머물다가 시의적절 하게 몸으로 우러나와 생물과 같은 존재로 탄생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생동감을 공급하는 삶의 원천이 됩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 ” (집회 1,1.4)

 

우리도 더는 혼자가 아니라 행동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체험을 한다면 이웃에게 우리의 신앙을 목숨처럼 증거 할 것입니다.(윤경재 요셉)


2. 지역, 이념, 계층, 신분, 학연, 세대라는 낡은 을 벗어버리면 좋겠습니다. ‘관용, 존경, 인내, 헌신, 사랑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쓰면 좋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역시도 권력을 쫓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고, 깨어있는 사람들의 외침이 모여야 이루어 질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하느님 앞에 신분이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누가 더 거룩한 사람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한 발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 안에 담갔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한쪽 발을 가끔 '자기 뜻'에 담근다 하더라도 말이다.


영혼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기 뜻'에 발을 담그는 횟수도
'나날이 조금씩 그러나 때로는 엄청' 줄어들게 된다.
하느님이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에겐 절대로 '영적후퇴'란 있을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직 '영적진보'만이 있을 뿐이다.  정말 놀랍다!


그래서 하느님 뜻,  내 뜻 !  통회하고,  죄짓고 !  왔다리,  갔다리 !  온탕, 냉탕 !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께 완죤히 100% 내맡기면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 내맡겨 보시면 제가 드린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한 번 내맡겨 보시라니까요!"
 

100% 완전히 내맡긴 영혼들은 그 외적인 모습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가 아니라 얼굴이 편안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내적으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함'으로 수시로 뜨거운 눈물의 감사를 올리게 되며,
'하느님에 대한 앎'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하게 되고, 
그래서 그 영혼의 입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떠날 날이 없다.(이해욱 신부)


3. 말씀의 수행자修行者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삶자체가 수행修行입니다. 수행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배워 체화體化해야 하는 수행입니다. 

겸손의 수행, 비움의 수행입니다. 참사람이 되는 수행입니다. 

 

수행자의 본연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단지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수용受容하고 이해理解하여 실행實行함으로 

말씀과 동화同化되어야 비로소 진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전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들어야 소통입니다. 부단히 들어야 자신을 압니다. 듣지 않아 듣지 못해 불통입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불통은 죽음입니다. 붙통에서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분도규칙도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됩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순종이요 겸손입니다. 

진정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이가 진인이요 선인이요 현인입니다. 

막연한 수행자가 아니라 ‘말씀의 수행자’가 진정한 수행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예수님이말로 참 수행자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


듣지 못하는, 반응할 모르고 공감할 줄 모르는 회개를 요하는 불통의 세대를 뜻합니다. 

무감각, 무의욕, 무의미의 삶의 늪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볼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르는, 

참으로 무뎌지고 굳어진 생각이 없는 사람, 관념이 없는 사람,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단정하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의 친구다.’ 하며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 

들을 수 있는 귀는 물론 볼 수 있는 눈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들의 삶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참 수행자의 삶이 바로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교회는, 그 어원을 찾아보면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믿고 따르는 모임,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 화려한 성전을 교회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교회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진정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서 교회임을 느낄까?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인 나는 정말 기꺼이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 사람이란 말인가? 훌륭하게 교회운영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고 싶은가? 아니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공동체의 모습으로 남고 싶은가
?

우린 너무도 높이 올라와 있습니다. 죄인들이나 세리같이 손가락질 받고 없이 보이는 이들과 어울리셨던 예수님은 물처럼 낮은 데로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입으로만 떠들어대지 말고 이젠 우리가 낮은 데로 내려가야 할 때 입니다
.

내려감의 굴욕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고 그분을 만나 뵈옵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줄 이웃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없는 사람, 부족한 사람,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그들을 내가 먼저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요
!

이젠 주위를 둘러보고 낮은 데로 임하시는 그분을 찾아나서야 할 때입니다
.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 분의 품에 안기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작은 자 되어야 합니다
.(강병규 야고보 신부님)
 

4. 오늘 복음은 회개하라고 당부하던 요한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대의 모순과 변덕스러운 태도를 지적합니다. 군중들은 회개와 함께 단식을 요구하던 요한을 미친 자로 취급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잡수신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으로 취급합니다(11,18-19).


예수님을 탄식하게 한 군중들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태도였지요. 회개하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굳어진 시각과 습관, 행동방식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자신이요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자기 생각과 판단이 옳고 낫다는 교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간하지 못하고, 잘못을 알고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됩니다. 참으로 자기만족과 자기평가에 도취되어 살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태도의 결과 교만에 빠지게 되면 자기 비교의 함정에 자주 떨어지고 다른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善)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매우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사고와 처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합과 일치가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지요. 늘 그들 안에는 부정적 시각과 열등감이 자리 잡게 될 뿐입니다.
 

나의 기준과 고정된 사고의 틀과 시각을 내려놓고 사랑이요 지혜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야겠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을 비추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온갖 거짓 우상과 교만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얼굴을 돌려야겠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지 말고 ‘주님의 거룩한 영’ 안에서 항구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9일[(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탓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경건하게 단식하면 자기를 드러내려고 단식한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단식을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인 행위를 묘사하신 것이지요.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보고도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요.

또한, 어떤 일을 하기 전과, 그 일을 한 뒤의 마음가짐이나 심정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지혜는 행동하는 지식입니다. 머리에 머물다가 시의적절 하게 몸으로 우러나와 생물과 같은 존재로 탄생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생동감을 공급하는 삶의 원천이 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 ” (집회 1,1.4)

 

나의 기준과 고정된 사고의 틀과 시각을 내려놓고

사랑이요 지혜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 발걸음을 멈춰야겠지요.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을 비추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온갖 거짓 우상과 교만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얼굴을 돌려야겠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거나 변덕을 부리지 말고

‘주님의 거룩한 영’ 안에서 항구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소망합니다. 


- 2016년 12월9일 금요일 과달루페의 성 후안 디에고님 축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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