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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016년 12월14일 수요일[(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묵상/시무나무 3장


2016년 12월14일 수요일[(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5,6ㄴ-8.18.21ㅁ-25

복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ㄴ-23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오묘하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이 제사로 힘을 얻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교회 안에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게 하소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일찍이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이토록 겸손하게 기다리던 메시아는 드디어 오셨지만, 요한은 감옥에서 그분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온갖 소문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왜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까? “예수님!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시지요? 이제 모든 일을 당신께 맡기고 저는 편히 눈을 감아도 되겠지요?” 이처럼 긍정적인 마음이었겠습니까? 아마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일찍이 당신을 메시아로 소개했는데, 막상 하시는 일을 전해 들으니, 도무지 메시아 같지 않습니다. 정말 메시아가 맞습니까?” 이처럼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까? 지난 주일에 묵상한 것처럼 요한과 예수님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아시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내가 아는 예수님과 실제의 예수님께서는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내가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법도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만들려는 예수님보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 갇혀 예수께서 활동하시는 내용을 직접 목격할 수 없었고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이제 자신은 조만간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자기 사명의 마무리를 짓고 싶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살아왔던 지난 시절이 헛되이 사라질까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오실 분이 맞는지 아닌지. 이는 요한이 결정을 내리길 주저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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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께서 응답하신 내용을 보면 확실한 결정을 속 시원히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요한에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라는 요청을 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겨 나옵니다. 여전히 정황적 주변 이야기를 통해 결정을 내려 보라는 요청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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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나온 요한의 제자들이 먼저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따라 스승에게 가서 사실대로 전하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족처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 말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느꼈던 답답함도 결국 우리 자신에게 들이미는 벼랑 끝에 선 모습 때문에 그렇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요? 숫제 속 시원히 내가 메시아라고 대답해 주셨으면 지금 우리도 진실을 훨씬 편하게 받아드렸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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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선물로 열어 주실 뿐, 최종 결정까지 내려주시어 우리를 자동인형으로 전락하게 하지 않으십니다.(윤경재 요셉)


2. 문득 생각합니다. ‘사제의 길, 사제의 정신은 무엇일까? 사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나라이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나라는 아닙니다. 사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표징과 가르침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물론, 타인의 십자가도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행복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며,
불행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도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몽땅 다 내맡겨 드렸고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없어졌는데 그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이해욱 신부)

4. 우리의 영적시야를 한없이 넓혀주는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육화의 신비에 대한 감격적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아기는 얼마나 연약한가!”


참으로 한 생각 안에 이 ‘하느님’과 ‘아기’ 둘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며 인간을 통해 만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안에는, 생각안에는 ‘하느님과 사람’이 언제나, 늘, 꼭, 함께 해야 함을 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인(마태 3,4) 요한은 신원의식이 뚜렷했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며,”(요한 1,2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마태 3,11)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요 심부름꾼으로 인식하고 자기 소명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무엇보다 더 먼저 하느님의 뜻을 중요시하며 실행하던 그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합니다(루카 7,19).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보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예수님 안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 흔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혼란과 의심에 떨어진 이들이 보도록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17,21-22)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17,23)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주님은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고,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며(이사 45,7),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45,21).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뜻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잠깐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동반자요 주인이십니다. ​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은 죄가 많아서도,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지 않거나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인간의 잣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주님의 사랑은 나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주님의 사랑을 확고히 믿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고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희망 달리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14일 수요일[(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의 복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이토록 겸손하게 기다리던 메시아는 드디어 오셨지만, 요한은 감옥에서 그분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은 왜 이런 의문을 품은 것입니까?

긍정적인 마음이었겠습니까? 부정적인 마음이었겠습니까?

부정적인 마음으로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까? 그것은 요한과 예수님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아시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내가 아는 예수님과 실제의 예수님께서는 많이 다르실 것입니다.

내가 하는 방법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법도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만들려는 예수님보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은 죄가 많아서도, 주님께서 내 안에 오시지 않거나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인간의 잣대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주님의 사랑은 나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고히 믿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고 앞만 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희망 달리기’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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