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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6년 12월21일 [(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묵상/좁은잎줄사철 1장



2016년 12월21일 [(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사람이 되어 오시는 외아드님의 탄생을 기뻐하오니, 주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그분께서 위엄을 갖추고 다시 오실 때,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아가는 노루나 젊은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는 연인의 모습을 노래한다(제1독서). 잉태한 마리아가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자 엘리사벳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친다(복음).


제1독서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또는 스바 3,14-18ㄱ>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한 저희를 언제나 돌보아 주시어,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영혼과 육신의 충만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늦둥이를 잉태한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입니다. 그러니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얼마나 따스한 위로입니까?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가득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공통된 아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 일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어머니가 자식에게 이런 길을 걷도록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뜻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 여인들이 하나 되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이기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제1독서 아가서는 연인관계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복음은 친구관계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연인관계의 사랑은 주님 도반과의 사랑의 관계로 읽을 수 있고, 

친구관계의 사랑은 사람 도반과의 사랑의 관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 중에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둘은 금세 소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터놓고 나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보리스 시릴뤼크는 이 복원력의 배경에는 모순어법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숭고한 어두움, 생의 눈부신 불행, 썩는 거름 위에 홀로 핀 장미등 같은 모순된 언어를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반대되는 요소들을 통합하는 심리적 유연함이 탄력성이 되어 시련을 이기는 복원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처녀가 애를 배었어도 비난은 커녕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말하는 엘리사벳이나 마리아의 응답은 모순어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위대한 복원력의 소유자인지, 또 모순어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질적 사례라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런 면에서도 영혼이 통하는 소울메이트였습니다.(윤경재 요셉)


4. 우리는 언제까지 청원기도를 바칠 것인가?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살레지오 성인(1567-1622)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의 청원기도는 '이 세상의 것들'에서 '하느님'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정 하느님의 사람은 재물명예칭찬사람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그것들의 원래 주인이신 하느님께 고스란히 다 되돌려 드린다.​(이해욱 신부)


5. 오늘 마리아는 서둘러 가서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를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사람들 안에 축복과 기쁨을 발생시키며, 섬기는 분이었다는 초기교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짐진 여러분은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이라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하느님, 삶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쁨을 영접하고 이웃과 그것을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는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이론(理論)의 대상도 아니고, 높은 옥좌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축복과 기쁨으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6.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하느님을 품음으로써 은총을 가득히 받으시고, 충만한 기쁨의 어머니가 되셨으며(루카 1,28),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1,42). 여기서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는 내 삶의 질을 가늠하는 관건이 되지요.

남을 해치려는 생각과 악하고 불순한 마음,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아가면 영혼이 혼탁해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소유할까에 온통 집중하면 그 대상에 매이게 되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복되고, 참 기쁨 중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신 하느님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쁨이신 분이 그녀를 방문하시어 함께해주셨기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일시적으로 발출된 정서적 기쁨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쁨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품어야만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12월21일 [(자) 대림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제1독서 아가서는 연인관계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복음은 친구관계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연인관계의 사랑은 주님 도반과의 사랑의 관계로 읽을 수 있고, 

친구관계의 사랑은 사람 도반과의 사랑의 관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신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서로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둘은 금세 소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터놓고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서둘러 가서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를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사람들 안에 축복과 기쁨을 발생시키며, 섬기는 분이었다는 초기교회의 믿음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태되면서부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는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축복과 기쁨으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잔치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 하느님을 품음으로써 은총을 가득히 받으시고,

충만한 기쁨의 어머니가 되셨으며(루카 1,28),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1,42).


여기서 무엇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가는 내 삶의 질을 가늠하는 관건이 되지요.


마리아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쁨이신 분이 그녀를 방문하시어 함께해주셨기에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의 기쁨은 일시적으로 발출된 정서적 기쁨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기쁨 자체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품어야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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