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23일 [(자) 대림 제4주간 금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게 하시나이다. 아멘.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요한이라고 이름 짓자 즈카르야의 혀가 풀리고, 이웃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한다(복음).
제1독서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신 저희에게 평화를 주시어,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오실 때에,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원래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었는데, 나이마저 많았지요. 그런데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지요. 그러자 그의 혀가 풀려 말하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을 대하며 인간이 생각하는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인간의 세계는 철저하게 힘 있는 자 중심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욱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이 있어야만 더 많이 가질 수 있기에 경쟁과 질시, 불화와 다툼이 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 세계에서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하느님의 세계는 다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사벳과 같이 아기를 잉태할 능력이 없는 여인을 택해 생명을 만드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생각하며, 신앙의 신비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와 엘리사벳은 아들의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 -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의미는 쾌락보다 더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다. - 빅터 프랭클
보석, 재산, 지위, 명예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의미의 본질은 ‘연결 짓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립니다. 연결 고리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어딜 가야 찾을는지 몰라서, 너무 가늘다고, 자기 멋대로 살기에 불편하다고 등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스스로 차단합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결코 그 연결 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밴 열 달 동안 내내 침묵 피정을 통해 자신 삶의 의미를 찾았고, 끝내 풀린 혀로 그 의미를 찬양하였습니다. 이 점이 우리가 매일 즈카르야의 노래를 성무일도를 통해 부르는 이유입니다.(윤경재 요셉)
3. 그리하여 하느님의 씨가 그 영혼 안에서 자라나 완전히 영혼을 채우게 되면
그 영혼은 마침내 '하느님처럼' 되어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되는데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이해욱 신부)
4. 말라기 예언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제 2성전 시기(바빌론 유배 후 서기 70년경까지)에 활동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키루스 왕)의 지원으로 지어진 제 2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았지요. 그러나 민족적, 종교적 생활의 중심인 성전은 유일신사상, 선민사상,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이요(신명 7,7-11) 자기 인식의 중심인 율법 등과 더불어 이 시기의 유다이즘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그런데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오히려 부정을 저질러 예배가 쇠퇴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부정부패를 꾸짖으시며(말라 3,2-3),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를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 지극한 배려입니다. 주님의 사자는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할 것입니다(3,4).
먼저 말라키 예언자가 알려주듯이 나의 영혼을 깨끗하고 의로운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3,2-3). 제 2성전기에 그 쓰라렸던 유배의 아픔을 잊고 현실에 안주하고 물질적 탐욕과 부정에 빠져버린 사제들과 같은 삶을 결연히 거부해야겠지요. 맑은 영혼만이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알아볼 수 있고, 애착의 뿌리를 끊어버린 사람만이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심부름꾼이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게 하듯이(3,24) 우리 또한 서로 화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정화와 화해는, 길들여져 익숙한 습관과 전통의 틀을 벗어버릴 때 가능해지겠지요.
오늘 복음의 요한의 탄생에서 보듯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오시고 탄생하시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뜻을 뛰어넘습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제 2성전기의 이스라엘 사제들처럼 전통과 묵은 관습을 붙들고 있는 한 주님의 오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진정으로 주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잠시 멈추어 나의 신념과 이상, 생각, 인생관과 세상관, 습관, 당연한 듯 따르는 규범과 상식 등을 새롭게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늘 그렇듯이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에 문득 ‘놀라운 선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안의 쓸데없는 생각과 편견들, 케케묵은 습관의 편린들과 애착의 그림자를 태워주시어, 좋으신 당신을 바로 알아보고 맞아들일 수 있도록 정화시켜주소서! 또한 오직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게 하소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5.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몫에 충실했습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인 동시에 은혜를 전하는 귀한 존재입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6.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요한(하느님은 자비하시다)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자신의 신원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리아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이처럼, 우리 모두도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원과 수도승이라는 신원과 사제라는 신원을 지니고, 각각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이영근 신부)
2016년 12월23일 [(자)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즈카르야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질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 말을 들은 즈카르야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반신반의하자,
천사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즈카르야의 입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1,5-20 참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요한(하느님은 자비하시다)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자신의 신원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리아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즈카리아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요한은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이름의 뜻대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름을 정하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 의미는 쾌락보다 더 강력한 삶의 원동력이다. - 빅터 프랭클
보석, 재산, 지위, 명예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의 탄생에서 보듯이 우리 안에 주님께서 오시고 탄생하시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뜻을 뛰어넘습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주님께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제 2성전기의 이스라엘 사제들처럼 전통과 묵은 관습을 붙들고 있는 한
주님의 오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 안에 진정으로 주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도록 잠시 멈추어나의 신념과 이상, 생각, 인생관과 세상관, 습관, 당연한 듯 따르는 규범과 상식 등을 새롭게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늘 그렇듯이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순간에 문득 ‘놀라운 선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안의 쓸데없는 생각과 편견들, 케케묵은 습관의 편린들과 애착의 그림자를 태워주시어,좋으신 당신을 바로 알아보고 맞아들일 수 있도록 정화시켜주소서!
또한 오직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게 하소서!
아멘.
- 2016년 12월23일 금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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