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16년 12월24일 [(자)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중국굴피나무 2장


2016년 12월24일 [(자)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 예수님, 지체하지 말고 어서 오시어, 주님의 사랑을 믿는 저희를 위로하여 주소서.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함게 하시나이다. 아멘.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주님의 집을 짓겠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다윗 집안에서 구원자를 일으키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예언한다(복음).


제1독서 <다윗의 나라는 주님 앞에서 영원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1-5.8ㄷ-12.14ㄱ.16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7-79


그때에 요한의 67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즈카르야의 노래’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놀라운 이 성사로 생기를 되찾고 비오니, 마땅히 경배하올 성자의 성탄 축일을 정성껏 준비하여, 기쁜 마음으로 영원한 선물을 받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이지요. 하지만 그 노래가 우리의 가슴을 애틋하게 파고들지 않습니까?
오랜 기간 자식 없이 살다 말년에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하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아기가 장차 어떤 길을 가리라는 것을 아버지 즈카르야는 너무나도 잘 알았지요. 목숨마저 버려야 하는 길이 아닙니까?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그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주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따른 것이지요. 그러고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끝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고 올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며 자기 아들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잘 닦도록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애절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거룩해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이처럼 거룩한 희생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오늘 대림 시기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주님께 거룩한 희생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또 다시 성탄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 저버리고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강생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육화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결핍도 아기 예수님 탄생 때의 결핍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결핍은 우리 인간을 고통의 끝으로 몰고 갑니다.뿐만 아니라 극단적 결핍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때로 결핍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때로 결핍은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원이 됩니다. 부족함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결핍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너그러움입니다. 결핍을 즐기는 여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 구세주께서 ‘결핍의 끝’인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신 사건, 만왕의 왕께서 ‘결핍의 끝판 왕’인 마구간 탄생은 워낙 특별한 사건이요 대단한 신비이기에, 그냥 세상의 눈,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봐서는 백번 바라봐도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자세를 낮춰야 아주 조금 성탄의 신비가 이해됩니다. (스테파노신부님복음묵상(결핍의 끝판왕 아기 예수님의 성탄))

​2.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써가는 하느님 은총과 우리 노력의 합작품이 우리 인생 성경입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경책입니다. 

하여 저의 지론은 3종류의 성경입니다. 

하나는 신구약 성경, 하나는 자연 성경, 하나는 내 인생 성경입니다. 

하루 한 쪽씩 써가는 하느님께서 주어가 된, 내 인생 성경책입니다. 

나이 곱하기 365일 하면 아직은 미완未完인 내 인생 성경의 쪽수가 나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속상한 일, 화나는 일, 원망이 생겨나면 그것과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귀의 고삐를 잡고 당기면 나귀는 내 곁에 머물게 되듯이, 원망, 분노, 미움의 고삐를 내가 계속해서 잡고 있으면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련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즈카르야는 의심이라는 고삐를 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즈카르야에게는 수련과 침묵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는 날, 즈카르야는 수련과 침묵을 끝낼 수 있었고, 이제 의심이라는 고삐를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권능을 받아들인 즈카르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존하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야 하고, 그분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우리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노래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이 모두에게 즐겁고, 평화롭고, 희망의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은 번뇌와 갈등, 욕망과 미움의 고삐를 놓아 버리는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수련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처럼, 마리아처럼, 즈카르야처럼 우리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즈카르야는 하느님께 세 가지 은총을 한꺼번에 받았습니다. 잠시 잘못된 생각을 하여 벙어리가 되는 체험과 아들 요한을 통해 자신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속량하신다는 약속이 실현되는 현장의 증인이 된 것 세 가지입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벙어리로 만드신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애에 대해 숙고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즈카르야는 다른 유다인들처럼 장애를 하느님께 큰 죄를 지어 벌 받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겪었을 마음의 고통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본 이유는 남보다 더 나아야 행복할 것이라고 비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 벌을 받아서 그리 된 것이니 어쩜 당연한 인과응보 아니겠냐는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불편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장애인을 볼 때 그들도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하느님께 사랑 받아야 할 동등한 자격을 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장애는 조금 불편함을 줄지언정 무엇인가 크게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장애가 징벌이 아니라 또 다른 은총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생각을 고쳐먹자 이제와는 전혀 다른 시야가 열리는 소박한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도리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찬미기도가 저절로 읊어졌습니다. 그동안 장애를 하느님께서 만드셨을 리가 없을 거라 추측했던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장애가 고통스럽기는 해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소중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그저 놀라울 지경이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 이름을 주님의 은혜라는 뜻인 요한이라 짓겠다는 엘리사벳의 대답을 듣고 즈카르야도 그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즈카르야보다는 요한이라는 새 이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자 그의 혀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구 외치고 싶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겪은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이제 모든 것을 선명히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허언이 아니고 드디어 성취된다는 것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어디에 있는지를.

 

즈카르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느님께 찬미를 올렸습니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그저 뱉어 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자기가 본 예언의 말을 제 혈육인 갓난아기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윤경재 요셉)


5. 즈카르야는 아들이 태어나자 기쁨에 겨워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 노래를 드립니다. 그의 희망은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면서 그 종살이를 알게 모르게 체험합니다. 반복되는 나의 죄와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함을 체험합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 포기하고 싶지만 자꾸만 나를 이끌어 가는 욕망과 욕심을 부끄러이 고백합니다. 내 부끄러움이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부끄러움이 우리가 그분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 신앙은 나를 믿고 나를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나의 모습을 희망하고 나 자신을 믿고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이 부족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이제 우리의 구유, 우리의 마구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 마음 안에 탄생하실 것입니다
.(홍성민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6. 오늘 제 1독서에서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먼저 다윗 왕가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어 안정된 삶의 터를 마련해주시고 지켜주시며(2사무 7,10-11),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7,12).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그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루카 1,68). 오실 구세주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1,72-75).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1,78-79) 주님의 성탄은 단순히 우리와 거리가 먼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탄생 신화를 전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거룩함과 평화를 호흡하는 유일한 길은 현세적 가치와 육의 정신으로부터 떠나 주님을 갈망하고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는 길 밖에는 없음을 기억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성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낮은 곳으로의 발걸음입니다. 낮은 곳이란 일시적으로 그저 나보다 더 안 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은 무엇보다도 내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채우고, 다른 이들이 언제든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랑의 쉼터’가 되도록 자신을 비우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품고, 생명의 혼을 지니고 낮은 곳, 후미진 곳,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두리로 달려가는 그 발걸음에 이미 성탄의 기쁨은 퍼지겠지요. 주님의 탄생을 앞두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7. 성탄축일은 예수님이 빈약하고 허약한 인간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호화롭고 호사스런 삶에는 흔히 허세와 허영이 끼어들어 인간 삶의 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허세와 허영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어둠 안에 살게 합니다. 인간 생명이 살고 자라는 건전한 온상(溫床)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보살핌이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재물만, 혹은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보살펴야 하는, 허약한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인간 욕심이 뿜어내는 어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요한복음서(1, 5)는 말합니다. 그런 우리의 어둠 안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초라한 구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약하게 다가갑니다.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겠다는 사람 안에는 나눔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구유의 초라함과 연약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진실입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연약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없애는 보살핌을 실천할 때만, 성탄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축일일 것입니다.(서공석 신부 강론)


8.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며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당연한 철칙(鐵則)으로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목자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루가복음서 저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 신앙공동체에서 볼 수 있었던 현상 하나를 겹쳐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의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리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과응보를 진리라고 믿고 살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소식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제대로 알아들으면, 그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신앙인은 계명을 지키고 재물을 봉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서 곰곰이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그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자기 마음속에 새기고 기억하여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성탄축일이 인류역사 안에 발생시킨 기억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준 것이 사람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관습들입니다.(서공석 신부 강론)


9. 성탄 대축일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생각하는 날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고, 그분이 출생하자 동방에서 세 박사가 베들레헴에 와서 참배하였다고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동방의 세 박사 이야기는 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 있었고, 요셉이 만삭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가 그곳 외양간에서 예수를 출산하여 구유에 눕혔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은 그 생명의 기원(起源)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에...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는 빛이십니다. 그러나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도 말합니다. 모두가 그분을 빛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지키고 바쳐야 하는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총과 진리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포합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에서 은총과 진리를 배우라고 선포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만이 하느님에게 가는 길이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풀고, 용서하고, 보살피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고 또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요한 20, 22).

 

우리 교회의 현행 고해성사 양식은 13세기에 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보속을 하였습니다. 그 시대 공의회가 개별 고해성사 제도를 도입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엄청난 보속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그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내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도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을 타이르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둠은 그분에 대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둠은 섬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기쁨의 축일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지만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욕심내는 것은, 구약성서 한 구절을 빌려 말하면,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욥기 14, 1-2)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베들레헴 외양간의 구유에 누운, 어린 예수 안에 당신 스스로를 나타내셨습니다. 인류의 일원인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할 것을 호소하면서, 예수님은 오늘 구유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도록해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신부 강론)

 


2016년 12월24일 [(자) 대림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그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즈카르야의 희망은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해 줄 구원자에 대한 희망입니다.


우리 신앙은 나를 믿고 나를 희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나의 모습을 희망하고 나 자신을 믿고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이 부족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이제 우리의 구유, 우리의 마구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우리 마음 안에 탄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라한 구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약하게 다가갑니다.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겠다는 사람 안에는 나눔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구유의 초라함과 연약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진실입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연약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없애는 보살핌을 실천할 때만, 성탄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축일일 것입니다

아멘.

- 2016년 12월24일 [(자) 대림 제4주간 토요일]...수산나 -



중국굴피나무 1


중국굴피나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