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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12일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황벽나무 6장



2017년 1월12일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이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가 와서 도움을 청하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를 치유하시고,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십시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3,7-14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자를 치유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기적 중에서 나병 환자의 치유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나병 환자의 간절한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애절함과 겸손함은 영혼의 나병 환자들에게 모범을 주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나병 환자의 청원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문드러지고 흉측해지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병 환자처럼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천형(天刑)은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와 연민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듣고자 하는 사죄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 병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가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보면(레위 13,45-46 참조),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저기에게 접근해 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이기 때문에,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와서 치유를 받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 자신이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곧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입니다.

 

이는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 달려있기에 오로지 스승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곧 스승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스승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곧 우리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도록 하기보다, 하느님의 기도에 우리가 응답해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이 제게서 이루어지소서!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2.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이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십시오.”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성규4,74).

절망이 대죄입니다. 희망을 잃은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육신의 나병만 아니라 마음의 나병도 무섭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소외시키는 절망, 불신, 미움, 탐욕, 질투, 분노, 허영, 나태, 우울, 중독 등 모두가 일종의 마음의 나병들입니다. 

마음의 나병들이 치유되면 육신의 치유는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마음의 나병을 치유해 주시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ㄹ과8ㄴ). 

늘 말씀드립니다만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자포자기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3.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미색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치유를 받게 됩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믿으면 보게 되고, 사랑하면 알게 된다.’고 합니다. 믿으면 이제까지 보았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면 이제 까지 알았던 것과 다른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형제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변했어!’ 그 형제님은 이제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거절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작은 일에 화를 내기보다는 참았고, 주일에는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하기로 정했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재물과 명예, 욕심과 이기심의 바다를 건너 나눔과 봉사와 사랑과 평화의 세상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누이 미르얌마저도 모세를 시기하자 성막에서 구름이 물러나며 미르얌에게 나병을 벌로 주셨습니다. 모세가 나서서 청원 기도를 올리자 이레 동안 진영 밖에 격리하였다가 돌아오게 하시어 나병을 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병 환자는 굉장한 용기를 냈습니다. 어쩌면 돌멩이 세례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보통은 여럿이서 몰려다니며 자신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잘 들어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자신 안에 응어리진 서러움을 하소연하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한자로 성스러울 , 성인 자는 귀 , , 북방 등 세 부수가 합쳐서 한 글자가 되었습니다. 그 뜻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성스럽다는 건 먼저 귀로 듣고 나서 입으로 해결책을 이야기 해 주는데, 북쪽 은미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은 듯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은미한 곳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고 해결하시는 게 성스러움이고 성인입니다.(윤경재 요셉)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 한 사람을 낫게 한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믿으셨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분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이 알려 주셨다.(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5.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며’ 그를 고쳐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법정(法定)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들을 격리시키는 시설들이 많이 있었고, 현재도 있습니다. 격리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병을 진단하는 방식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환자로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 환자는 마을에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 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병은 부정(不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죄인, 곧 더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레위 13,44-46). 율법은 부정한 이들과 신체적 접촉을 금합니다. 접촉을 한 사람도 부정한 사람, 곧 죄인으로 취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면서 그 사람을 고친 다음,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부정을 벗어나는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죄의 대가로 주어진 병이라 믿었기에, 치유 여부를 사제가 확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와 접촉하였고, 임의로 격리를 해제하였기에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그런 불가사의한 일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면서도, 나병환자를 고쳐서 사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는 일”, 곧 “선한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 당하는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그분 안에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주었으며,….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였다.(53,4-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은 있어도 정의를 빙자한 분노는 없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분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죄에 속한 육의 모습으로”(8,3)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 안에 같은 친교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당신과의 친교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정의를 빙자한 우리의 분노는 인류공동체에서 우리를 분리하고, 우리 스스로를 높여서, 하느님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이 아닙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에 대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지, 보상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가
17,10)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6. 오늘의 서간은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시편 94)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인들의 충실을 권고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없도록"(히브 3,13) 늘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하느님 앞에서 바로 그 충실성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 도움을 청합니다(마르 1,40). 당시에 나병은 가장 불행한 재액(災厄)으로 여겨졌기에 나병환자들은 성 안에 들어갈 수도 신앙공동체에 낄 수도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송장’(민수 12,12) 취급을 받았던 그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그지없었지요. 그런 나병환자가 제 발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저 깊은 골방에 틀어박혀 한숨으로 온 방을 가득 채우며 겨우 연명할 법도 하건만 그는 과감히 일어나 자신의 민낯을 예수님 앞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기에 자신의 아픔과 한숨과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모두를 묵묵히 받아들인 것이지요.
우리도 나환자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신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 수치스런 모습, 영혼의 어두움을 거부하거나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시며, 내 어둠을 비추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나환자는 하느님이 주인이신 구원의 시간인 ‘지금’, ‘오늘’에 집중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조건이나 상황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키워갑니다. '지금’이 구원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참 사랑도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지요.
나병환자는 자신을 사랑할 사랑의 힘을 주시는 구세주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1,40) 하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인간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생명의 힘을 보았고, 믿음으로 충실하게 그분께 자신의 처지를 내맡길 때 생명을 되찾을 수 있음을 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1,41) 고쳐주십니다. 사랑은 사랑을 위해 존재하고, 가엾은 마음은 사랑이 결핍된 사람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지 않고는 참지 못합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터 위에서 드러나는 믿음과 충실성을 치유를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 받은 나환자에게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1,44) 하고 단단히 이르십니다. 그러나 치유 받은 이들은 치유 받은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1,45). 치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의 힘은 아무도 막을 수 없지요.

오늘도 나의 부끄럽고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겸허하게 무릎 꿇고 깨끗하게 해주시라고 청해야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생명이신 주님의 끈을 놓지 않는 충실함과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다가가 서로를 치유하고 해방시켜주는 ‘사랑의 도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이 만날 때 생명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기경호 프란치스코신부)


2017년 1월12일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오늘의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나병 환자의 청원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문드러지고 흉측해지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병 환자처럼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할 천형(天刑)은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와 연민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듣고자 하는 사죄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 병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은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가 교회의 소중한 자산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안내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을 통해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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