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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흑호도나무 1장


[매묵]2017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이 계시다며,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옥좌로 나아가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레위는 마태오 복음 9장 9절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입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바로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변신한 이 사건은 심오한 복음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세리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유복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는 세리들을 매국노나 부도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거지들도 그들의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 우월감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은 더욱 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들과 친교를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구원과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평범한 어부들,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세리를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확신과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약점과 죄스러움이 구원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 할 가르침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 이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주님께 달려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2. 한번의 부르심과 응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평생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떠나 그분을 따르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이어져 연결連結되면 살고, 끊어져 단절斷絶되면 죽습니다. 

부르심을 받자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입니다. 
주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더불어 동료들과의 수평적 관계입니다. 
비로소 관계속의 존재가 된 레위입니다. 
예수님은 관계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주님의 구원의 식탁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과녁이 정해졌으면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낼 수있기 때문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유다인들이 성전에서 속죄제물을 바치는 이유도 새 출발을 다짐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의식은 늘 형식에 빠질 위험성이 큽니다. 한번 형식에 빠지면 그 형식을 잘 아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진심으로 속죄하는 것보다 형식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가 더 말을 하게 됩니다. 아는 게 힘이 아니라 아는 게 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죄가 크면 속죄제물을 바치는 횟수와 양도 커야 된다고 여겼으니 그렇게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죄를 없애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번 따돌림을 당하면 원상 복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뇌리에 각인된 낙인효과가 주는 피해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정개가 더 중요하니 질적인 변화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는 감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경험해야 힘이 생깁니다. 힘이 생겨야 지속 가능하게 됩니다
 또 예수께서는 따돌림에서 벗어나 뇌리에 새겨진 각인효과를 해소할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받아들여 예전의 자리로 원상회복 시켜주는 것이며, 새로운 책임 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동양의 종교와 사상은 깨달음 뒤에 밀고나가는 힘이 생기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요가와 호흡법 같은 수련법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께서는 온몸의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 아버지께 다가가는 힘을 얻으신 것입니다. (윤경재 요셉)


5.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선민사상’과 선행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상선벌악’의 사고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편협된 시각과 폐쇄적이며 경직된 사고로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세리를 제자로 삼으시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2,17)이라 하시며 행복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여십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의인은 구원받지 못한다거나 죄인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죄인들도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구원받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과 동료 인간들을 선과 따뜻한 애정과 깊은 헤아림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해야겠지요. 하느님의 시각,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품을 수 있어야겠지요. 주님의 영과 사랑으로 차별하고 편을 가르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악과 불의와 거짓은 몰아내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아야지요.

구세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하찮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잣대, 사회적 지위 등을 내세워 함부로 남을 판단하려 드는 처사야말로 꼴불견입니다. 복음을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를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랑으로 품을 것인가를 늘 고민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선민사상과 상선벌악, 이분법적 사고와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아픈 곳부터 치료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먼저’ 죄인들, 양심이 무디어져 수치심을 잃어버린 이들, 고통과 차별을 당하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려야겠습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채워나가야겠지요. 오늘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도록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배척하지 않고 사랑으로 품는 넉넉하고 푸근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구원과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세리를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확신과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약점과 죄스러움이 구원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 할 가르침입니다.
아멘.

- 2017년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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