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매일미사 묵상/겹벚꽃나무 5장


[매묵]2017년 1월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시고,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한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시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성경을 보면 단식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실행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일치와 만남을 위해 단식하였습니다(탈출 24,18 참조). 바빌론 왕국의 재상 하만이 유다인들을 몰살하려고 시도하자 에스테르 왕비는 사흘 동안 단식하였습니다(에스 4,16 참조).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로 가서 그 도시의 멸망을 선포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습니다(요나 3,5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참된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마태 6,16-18 참조). 우리는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며 하느님 아버지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단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식이라는 육체적 수련으로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형제적 사랑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제의 훈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영혼 안에 채우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하며 속죄와 나눔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와 함께 구원의 혼인 잔치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비통해하며 단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단식은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며 회개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그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이영근 신부)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4,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르 2,19~20)
 
지금은 구원의 시기이며 단식이 필요한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절실한 자신의 물음이 될 때 저절로 단식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보여주셨던 예수를 다시 뵙기를 청하며 단식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마치 욥이 네 친구들의 위로를 거부하고 끝까지 하느님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소문이냐 나의 의문이냐의 차이는 남이 문제를 제기한 것을 푸는 단계에 멈추느냐 아니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단계로 도약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남이 제출한 문제를 푸는 대상에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욥처럼 에디슨도 슈라이어도 자신에게 문제를 던졌습니다.
 
불교에서 화두 풀이도 남이 풀이해 논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해 답하면 스승은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고 구체적 몸의 언어를 드러내야 겨우 인정해 주십니다. 새로운 화두를 창조하여 스승께 되물을 수 있어야 겨우 승낙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물음을 제기하는 두 번째 단계마저도 또 뛰어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예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처럼 살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참뜻도 여기에 담겼지 않을까요?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윤경재 요셉)

5. 30일 피정을 하면서 겸손의 3단계를 묵상하게 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운전으로 이야기하면 준법운전과 같습니다. 이렇게 겸손을 보이기만 해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일미사를 꼭 지키고, 교무금도 잘 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가족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십계명은 물론이고, 작은 것들까지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운전으로 이야기하면 안전운전과 같습니다. 나의 신앙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매일 미사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례하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여러 행사에 참석하고, 이웃들에게도 참석을 권하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여러 단체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겸손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운전으로 이야기하면 양보운전과 같습니다.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 것은 세 번째 겸손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신앙의 별이 되었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세 번째 겸손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7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6.  사실 예수님의 삶은 그다지 경건하거나 단식과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율법을 거슬러 죄인과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파격적인 모습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는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과 의로움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새로움이 있었습니다. 옛 것과 기존의 것을 의문에 붙여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움과 구원의 때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 포도주를 마시고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철저히 새로워져야겠습니다. 철저히 새로워진다는 것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겠지요. 세속의 정신을 철저히 버리는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이 사랑의 축제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고 다가가 손을 맞잡아야겠습니다. 삶 한복판에서 구원의 잔치를 벌이고, 새 포도주를 담을 준비를 하려면 근원적인 새로움이 필요합니다. 회개와 단식을 통해 사랑의 부대를 가득 채움으로써 삶을 축제로 바꿔나가는 기쁜 오늘이길 희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7.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와 함께 가다가 참 행복에 관해 말합니다.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니냐?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아니다. 참 행복은 내가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했을 때, 그 사람이 욕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것이 참 행복이다. 그리고 다신 문을 두드려 또 청하면 그 사람이 오물을 끼얹을 텐데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다시 문을 두드려 형제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조를 때, 그 집 주인이 몽둥이를 가져 나와 나를 때린다면 이것이 참 행복이다.”


행복은 고통이 없는 것으로 알았던 우리에게 이 성인이 정의한 행복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추운 겨울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면서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온천을 겨울에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는 바로 그 뜨거움과 그 차가움이 함께 만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노천탕에 가기 위해 더운 목욕탕 문 밖으로 나가면 칼바람이 불어 매우 춥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살아가는 그 자체가 칼바람입니다. 이 칼바람이 멈추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을 텐데 왜 이 고통 가운데 살게 하셨을까요? 바로 고통 없이는 참 행복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칼바람이 있어야 온천의 뜨거움도 기쁨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고통과 멸시를 청했던 것입니다.   고통과 사랑은 단짝입니다. 희생과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닥쳐올 고통과 멸시가 기대됩니까? 그러면 삶의 의미를 찾은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자신으로 만족하기에 멸시를 원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면 세례자 요한이 지목하고 있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삶의 의미이고 그 변화된 십자가의 삶이 삶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 편안함만을 원합니까? 참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의미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은 편안함만을 찾으며 두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원한 결과가 기다립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왜 세상을 이기게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지목하고 있는지 그 무게감을 신중하게 직시하고 따라가 삶의 이유인 그분을 꼭 만나 뵈어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신부)

8. “인간이 왜 사는가? 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는가? 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왜 사느냐? 라는 질문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행복인데 왜 사는가? 라는 뚱딴지 같은 질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런 질문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은 사랑하는 데 있고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신랑과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이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 되는 것이다. 즉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보완해주고 채워주는 것이고 그래서 완성시키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서로를 진실히 사랑한다면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관계이며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이다. 따라서 신랑과 신부는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 상대이기 때문에 떨어질래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인간의 신랑이시다.(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2017년  1월16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마시고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혼인잔치에 참여하려면 철저히 새로워져야겠습니다.
철저히 새로워진다는 것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겠지요.
세속의 정신을 철저히 버리는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와 함께 가다가 참 행복에 관해 말합니다.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아니냐? 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 아니다. 참 행복은 내가 어떤 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님의 이름으로 빵 한 조각만 주십시오했을 때, 그 사람이 욕을 하며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것이 참 행복이다. 그리고 다신 문을 두드려 또 청하면 그 사람이 오물을 끼얹을 텐데 그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다시 문을 두드려 형제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조를 때, 그 집 주인이 몽둥이를 가져 나와 나를 때린다면 이것이 참 행복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원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세상 편안함만을 원합니까?
참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의미를 아직 찾지 못한 사람은 편안함만을 찾으며 두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아멘.



겹벚꽃나무 1


겹벚꽃나무 2


겹벚꽃나무 3


겹벚꽃나무 4


겹벚꽃나무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