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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17일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매일미사 묵상/계수나무 5장


[매묵]2017년 1월17일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매일미사 묵상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가 어둠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구원의 성사로 힘을 얻어,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안식일 규정의 근본 의미는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쉬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지 말고 땔감을 모으지 말며 불을 피우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외면상으로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사업을 도우려고 움직이고 있는 제자들은 ‘안식일의 주인’을 섬기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이 사람을 얽어매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랑과 자유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율법, 곧 하느님의 법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고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하고자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고 당신의 법을 어기더라도 회개할 때까지 참아 주시며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재화가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분배되기를 바라십니다. 허기를 채우려고 밀 이삭을 먹은 제자들의 행위는 하느님 앞에 정당하며 단죄받을 수 없습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하느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린 성인의 행위는 십계명을 완성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어제 <복음>에서 단식의 정신을 새롭게 하시면서 당신이 ‘신랑’임을 선언하셨듯이, 오늘은 안식일의 정신을 새롭게 하시면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12,7)
 
 하오니,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정작 형제에게는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인 까닭입니다. 사람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오늘 제 자신이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2. 오늘 기념하는 ‘수도승들의 아버지’라 칭하는 안토니오 성인 역시 경이驚異롭기 한이 없습니다. 
잠시 그에 관한 일화를 나눕니다.

-양친이 죽은 후, 그는 많은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19,21)라는 말씀을 듣고 곧이 곧대로 실행했습니다. 
이어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6,34)라는 말씀을 듣고 남은 최소한의 재산마져 처분하고 독수자가 됩니다. 

그는 소금과 곁들인 빵과 물만 먹었고, 잠은 거친 매트에서 잤습니다. 
그는 곧 겸손과 거룩함과 자기절제의 모델이 되었고 숱한 유혹에 맞서 잘 관리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6개월 마다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이만을 제외하곤 
누구도 만남이 없이 산꼭대기의 옛 성의 폐허지에서 하느님만을 찾으며 지냈습니다. 
마침내 첫 수도원을 세웠고 필요로 할 때만 수도원을 방문했고 독수자로 홀로 살았습니다. 

그 엄격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정력적이고 기쁨 가득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수도승들 가운데서 단지 그의 ‘명랑함(cheeriness)’으로 한눈에 그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이 그로부터 배운것처럼 안토니오 역시 그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마침내 356년 선종했으니 그 나이 105세입니다. 
그때까지 결코 아픈 적도 없었고, 늘 건강한 시력에 건강한 치아를 지녔다 합니다.-

참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경이로운 인물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하느님께 깊이 깊이 내렸음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신학교의 교정에는 교가가 있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에 그느르심 아득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어제 다시 읽어 보니 가슴이 뭉클합니다. 가사의 내용처럼 살지는 않았지만, 그 가사를 만드셨던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후배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신학교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재형 신부)

4. 사랑을 얻는 것도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가능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절대 희망이신 하느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도록 합시다. 사랑의 인내와 기다림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사랑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임”(마르 2,27)을 명심하며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투신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5. 그들(동방박사)이 먼저 길을 떠났기 때문에 별을 보았습니다(성 요한크리소스토모 참고). 그들의 마음은 지평선에 열려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늘이 그들에게 보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쉼 없는 내면에 인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에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동방 박사들은 믿는 이들의 전형이며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들의 전형이며 그들의 집 하늘 나라의 본향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마음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했던 모든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서 솟아납니다. 그들이 복음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우리의 삶을 작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드는 모든 시도 앞에서 우리가 깨어있도록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갈망은 어둠의 모든 예언자들 앞에서 저항하는 믿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갈망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희망을 살아 있게 합니다. 매주 계속해서 간청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이 같은 갈망이 나이든 시메온을 매일 성전에 가도록 이끌고 구원자를 두 팔에 받아 안기 전에는 그의 삶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갈망이 그 자기 파괴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그의 아버지의 품을 찾도록 탕자를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아흔 아홉마리를 놓아 둔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가는 목자가 느끼는 갈망입니다. 무덤에 달려 가서 부활하신 스승님을 만났을 때 그 주일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같은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철갑 같은 고립에서 우리를 꺼내 줍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우리의 따분한 일상을 산산이 부수어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변화를 만들도록 우리를 떠밀어 냅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이 갈망을 느끼는 믿는 이들은, 동방 박사들이 했던 것처럼, 주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기 위해 믿음에 인도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변부로 갑니다. 최전방으로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장소들로 그들의 주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우월감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아직 미지의 영역인 사람들의 눈을 못 본척할 수 없는 구걸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합니다.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과 태도가 베들레헴과 가까운 헤로데의 궁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길을 떠나 가는 동안 예루살렘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찾기 보다는 잠자고 있던 헤로데와의 공모하여 예루살렘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잠자고 있었고 마비된 양심으로 무감각해져 있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혼란스러웠고 두려웠습니다. 역사를 뒤바꿀 새로움에 직면했을 때 혼란스러움은 그 안에 닫혀 버리고 그 성취, 그 지식, 그 성공에 갇혀 버립니다. 자신의 부유함 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자의 혼란은 아직 그 혼란을 넘어서 보지 못합니다. 그 혼란스러움은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박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는 문화 안에 빠져 있는 사람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오로지 승자들을 위한 자리만이 존재하는 그 문화 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움. 두려움에서 비롯된 혼란스러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 앞에서 느끼는 불길한 예감은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진리와 세상과 이 삶에 집착하는 우리의 방법들에 의문을 갖게 합니다. 헤로데는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헤로데를 범죄 안에서 안정을 찾도록 이끌었습니다. “너는 그들의 몸이 작은 이들을 죽인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네 마음 안에서 너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성 구옷불트데우스 (SAINT QUODVULTDEUS), Sermon 2 on the Creed: PL 40, 655).
 
우리는 경배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경배하러 동방에서 왔고 그들은 왕에게 어울리는 곳, 왕궁에서 그렇게 하려고 왔습니다. 그들의 탐구는 그들을 궁전으로 이끌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궁전 안에서 모든 그의 신하들에 둘러싸여 왕궁에서 태어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권력과 성공, 성취의 삶에 대한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공경을 받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아첨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이죠, 그러나 반드시 사랑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것들은 세속적인 카테고리들, 우리가 존경하는 볼품없는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대한 숭배, 외모와 우월함에 대한 숭배. 슬픔만을 약속하고 오로지 노예로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우상들.
 
멀리서 온 그 사람들이 그들의 가장 긴 여정에 나설 곳은 그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대범하게 더 힘들고 어려운 여정에 나섭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것이 궁전에 없으며 실존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궁전에서 그들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왕을 찾도록 그들을 이끌었던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압제가 아닌 자유의 기치 아래에서만 이 알려지지 않은 그들이 열망하는 왕이 우리를 깔보지 않고 노예로 만들지 않고 우리를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들어 올리시고 용서하시고 치유하심을 깨닫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 또는 우리가 그토록 자주 그분을 거부했던 장소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음을 깨닫는 것. 하느님의 눈 안에는 상처 받고 지치고 홀대 받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언제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러한 그분의 힘과 그분의 권능은 자비라고 불립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예루살렘이 베들레헴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요!
 
헤로데는 사물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방법을 바꿀 수도 없었고 바꾸지도 않을 것이기에 경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경배를 멈추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들도 경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훌륭한 지식을 갖고 예언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길을 바꾸거나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틀에 박힌 상황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시대의 헤로데에게 익숙했고 질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 베들레헴에는 새로움의 약속, 거저 주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정을 떠날 용기가 있었기에 동방 박사들은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고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 베들레헴의 예상치 못한 알려지지 않은 아기 예수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2017년 1월17일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오늘의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 규정의 근본 의미는 ‘하느님 안에서 머물고 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고 당신의 법을 어기더라도 회개할 때까지 참아 주시며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재화가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만큼 분배되기를 바라십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하느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되돌린 성인의 행위는 십계명을 완성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절대 희망이신 하느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도록 합시다. 사랑의 인내와 기다림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런 사랑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임”(마르 2,27)을 명심하며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투신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정작 형제에게는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비인 까닭입니다. 사람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오늘 제 자신이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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