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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1월19일 목요일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묵상/꽃기린 6장


[매묵]2017년 1월19일 목요일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묵상/꽃기린 6장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대사제가 계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밀려드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25─8,6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12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지방 전역에서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내쫓는다는 소문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땅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토록 온 땅에 퍼져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다른 사람들은 척박한 이 세상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으려고 그분을 찾습니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그분을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장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찾는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만능 해결사로 이용하려 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부르면서도 진정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기심과 아집에 머물러 순수한 영을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고도 호기심에 머물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무너져 버리는 구경꾼에 불과하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가 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희생되시고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만난 사람들은 믿음의 기쁨과 구원을 얻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그들의 믿음은 반석과 같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더 완전한 신앙인이 되어갑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조욱현 토마스 신부)



2. 오늘 복음을 보면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맛보고자 예수님께 군중이 달려듭니다.
심지어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발설하지 말도록 하시고 더 나아가 거룻배를 타심으로써 사람들과 일종의거리를 두십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 그분을 찾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능력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거리를 존중하십시오.
하느님도, 사람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이해윤 루도비코 신부님)



3. 왜 일까?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당신은 치유 받은 이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셨습니다.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아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 곧 참된 모습을 볼 수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때’ 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결정적인 때, 십자가에 매달릴 때가 아니면,“하느님의 아들”의 참된 모습이 올바르게 밝혀질 수가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그러기에, 지금 십자가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할 일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3'.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3,12)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오니,
 알지도 못한 채
 당신을 잘못 알리지 않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진면목을 뵐 수 있도록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아 주소서.
 
 제 눈에서
 불신앙의 장막을 거둬내시고
 감추어진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전 삶을 압축한듯한 장면입니다. 
참으로 혼란한 시대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제자들과 호숫가로 물러가십니다만 
무수한 이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고,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자신을 폭로합니다. 
참으로 신바람 나는 장면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실 때 일어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축복의 기적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반복되는 삶의 역사입니다. 
예수님 당대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죄악이 만연된 세상에 병고에 시달리는 병자들 천지의 세상이며, 수없이 다양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1~12)
 
 <벙어리 동상> - 윤경재
 
하나이신 주님
우리도 하나만 남기고
모두 비우게 하소서
 
우리가 걸친 모든 게
거저 주신 선물이더라도
하늘에선 소용없을 것
쥐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평화인
이웃과 하나 되는 달란트만 지니게
허락하소서
 
아버지 앞에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벌거숭이 되게 하소서
 
제 말은 할 줄 모르고
사랑만 향해 쳐다보는
벙어리 동상이 되게 하소서
 
오직 주님 뵌 기쁨에
눈물 한 방울쯤
흐르게 허락 하소서



6.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안다는 듯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침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의 외침이 하느님의 계획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그저 기적이나 펼치시고 권능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시고 그 사랑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자체가 하늘나라가 이미 들어와 있는 기쁜 소식이며, 평화를 완성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습니다.(윤경재 요셉)



7. ‘설득이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로고스입니다. 이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증거를 이야기합니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으니 우산을 준비하라고 하면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실적이 올랐으니 상여금을 준다고 해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로고스만으로는 설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깁니다.
설득에는 두 번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파토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은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서 보듬어 주는 것이 더욱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이 우리 몸에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시원한 물을 한 잔 주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설득에는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설득의 3번째 요소는 에토스입니다. 예전에 미국제품이라면 튼튼하고 좋다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힘과 권위를 믿기 때문입니다. 삼성제품이라면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삼성이라는 기업이 가진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곧 정치의 계절이 올 것 같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저 사람이면 이 나라를 맡길 수 있겠다.’라는 신뢰를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히브리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들레헴에서는 위대한 예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대사제라고 설명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논리적인 설명,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마음에 이끌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진정성,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율법에 대한 열정,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인품을 보았을 것입니다.
 
신자분들이 원하는 사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위로해 주시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제는 신뢰와 사랑을 드릴 수 있는 덕과 인품이 있는 사제라고 생각합니다. (조재형 신부)



8. ♣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자(3,7ㄱ) 갈릴래아와 유다인들이 사는 모든 지방에서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듭니다(3,7-8).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만 모여들었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따라온 것입니다(3,10).

여기서 예수님 곁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신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온전히 인식한 것은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였습니다.

군중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을 겪는 비참한 상황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고 자석에 끌리듯 그분을 찾아온 것이었지요(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그들을 끌어내시어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3,9).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릅니다(3,11).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분을 거부하는 몸짓이지요.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긴 하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계시되고(1,11), 하느님의 아드님(3,11)으로 고백되며,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지만 그 뜻은 수난을 겪으시고 목숨바쳐 죽는 그때에야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참모습은 구마나 치유처럼 사람들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느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데서 드러나는 까닭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처럼 그저 부르심에 따르거나, 군중들처럼 하느님과 무관하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더러운 영'처럼 정확하고 심오한 인식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적 인식만으로는 믿음에 이를 수 없고, 그분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고, 그 수난의 사랑으로 목숨 바쳐 이웃을 사랑할 때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살아낼 때만이,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만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삶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한 함구하고, 아는 체 하지 않는 정직함이 우리다운 겸손한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의 힘이 아니라 철저히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2017년 1월19일 목요일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팔레스티나 지방 전역에서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내쫓는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온전히 인식한 것은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였습니다.


군중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고 자석에 끌리듯 그분을 찾아온 것이었지요(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그들을 끌어내시어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3,9).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릅니다(3,11).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긴 하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 소리 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 뜻은 수난을 겪으시고 목숨바쳐 죽는 그때에야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고,

그 수난의 사랑으로 목숨 바쳐 이웃을 사랑할 때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 2017년 1월19일 목요일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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