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 2017년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묵상
오늘 전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통하여,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뜻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 기도를 바치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고,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지 물으신 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슬퍼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7,1-3.15-17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성체로 저희에게 힘을 주시니,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삶에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뻗으라고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치유하십니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바리사이들에게 묻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시선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안식일 규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시선 속에는 증오와 미움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별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오해받고 일이 엉킬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좋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을 뻗으시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손을 뻗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은총을 내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옹졸할 때가 있습니다. 남들이 하는 일이 못마땅하게 보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둔한 원숭이처럼 자신의 손을 펴지 않아서 먹잇감과 욕심을 움켜쥐고 있다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선택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움켜쥐는 것과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서 남을 심판할 것인지 사랑의 잣대로 남을 용서해 주고 치유받을 것인지 선택할 때가 다가옵니다. 우리의 선택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 것입니까? (류한영 베드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혹 나도 지금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어 형제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것을 언제부터, 대체 왜 손에 쥐게 되었을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꼭 움켜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손을 뻗어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손을 뻗어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습니다.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오,구원자이신 까닭입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놓고서, 손을 뻗습니다. 마음을 풀고,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 사랑을 받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2.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채찍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 당신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너야말로 틀림없는 장애인이 아니냐.
가까운 형제를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좀스러운 정서장애.
작은 애착 하나도 끊지 못해 온몸이 쑤셔 오는 지체장애.
항상 남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시각장애.
충고의 말을 듣기 거북해하는 청각장애.
칭찬과 격려의 말에 아주 서툰 언어장애 등등” (장애인들과 동고동락했던 수녀님).
육신은 멀쩡해도 내적으로는 한두 가지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4. 예수님은 우선 손이 오그라든 이를 사람들 한복판에 세우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이 오그라든 ‘신체의 장애’도 문제지만 이처럼 바리사이들의 극도로 오그라든 완고한 ‘마음의 장애’도 문제입니다.
이어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였다니 ‘악惡의 연대連帶’에 전율하게 됩니다.
‘선善의 연대’보다 손쉽게 성사되는 ‘악惡의 연대’임을 봅니다.
“손을 뻗어라”
어찌보면, 우리 모두를 향한 “마음을 펴라” 란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을 활짝 펴주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그 작은 새는 자신의
온 몸으로 노래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꼿꼿이 하늘로 향하고
양 날개는 물론 자신의 꼬리까지 퍼득이며
온 몸으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으로 노래하는 새를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이른 봄에서 늦은 가을까지
해가 뜨기 전인 여명에서부터
해가 진 다음인 일몰 후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그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휘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휘~~~~"
새 백과사전을 뒤져 보았더니
그의 이름은 휘파람새였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제게로 다가왔습니다.
제 영혼 안으로!
그는 바로 자신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힘과 정성을 다해,
온 몸으로 주(인)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그처럼 찬미해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찬미해 드려야 합니다.
전 존재를 '하느님께 내맡겨 드려야'합니다.
휘파람새처럼 말입니다!(이해욱 신부)
5,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보다 빠르고, 눈치가 있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욕심이 있어서 자신이 잡은 먹이를 결코 손에서 놓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목이 좁은 항아리를 땅에다 묻고,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과일들을 넣어 듭니다. 원숭이는 주변을 살피고, 사람이 없는 것을 알면 내려와 항아리에 손을 넣어 과일을 듬뿍 잡습니다. 하지만 과일을 잡은 손을 항아리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움켜쥔 손을 펼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숭이는 그러지 못하고, 사람에게 잡히고 맙니다.
주변을 보면 거짓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거짓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들은 합당하지 않은 곳에 엄청난 지원을 하였습니다. 반대급부로 돌아올 엄청난 이익을 움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라는 독 과일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이 밝혀져도, 정의가 드러나도 끝내 독 과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진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와 질서를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감추고, 거짓으로 가리고,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타고 있는 배를 물속 깊이 가라앉히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평가에서 자유로우실 수 없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지내고, 먹고 마시면 그런 죄인들과 함께 지낸다고 비난의 말을 듣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아픈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면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야단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 합니다. 제자들이 배운 것이 없고, 안식일 법을 어긴다고 쑤군댑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런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다고 투덜거립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표징들, 그분이 주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들은 어쩌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권능을 사칭했다고 재판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법을 어겼다고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사건의 현장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 위에서 부활의 꽃은 활짝 피었습니다. 수만 명이 순교한 죽음의 땅에서 천주교회는 자라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내가 가장 약했을 때, 나는 비로소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법과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법과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잡고 있는 ‘거짓, 위선, 욕망, 원망, 시기, 질투, 권력, 명예’라는 독 과일들을 놓아버리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유로운 손으로 믿음, 희망,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조재형 신부)
6. 예수께서는 그렇게 거창한 철학이나 사상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날’이었습니다. 예수의 안식일은 달랐습니다. 예수에게 안식일은 자신이 쉬고, 이웃이 쉬고, 세상이 쉬고, 아버지가 쉬는 날이었습니다.
예수 앞에 양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양이 구덩이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안식일이지만 그 양은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걸 보시는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예수님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양이 사는 세상은 어떨까요. 세상 역시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 모두를 품으신 아버지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쉬지 못할 때는 아버지도 쉬지 못합니다. 내가 쉴 때라야 비로소 아버지도 쉬십니다.
쉰다는 게 무엇일까요?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일류 호텔에 머물며 바닷가를 걸어야 쉬는 건가요? 눈 덮인 설악산 콘도에 가서 따듯한 방에 앉아 멋진 설경을 바라보는 게 쉬는 건가요? 아마 한두 시간쯤 지나면 모두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 검색을 하던가, 카톡에서 친구들이 올리는 시덥지 않은 글에 대꾸하느냐 온 정신을 놓을 것입니다. 아니면 SNS에 오늘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그럴듯한 놈을 골라 올리기 바쁠 것입니다. 그러다 싫증나면 쇼파에 팔베게 하고 가로 누워서 TV드라마를 보겠죠. 그래도 이 정도면 좀 쉬는 축에 속합니다. 아예 회사 공동 카톡방이나 밴드에서 올라오는 업무나 확인하고, 이메일을 열며 밀린 사무를 본다면 쉬지도 못합니다.
시간과 장소만 옮겼을 뿐, 에고의 욕망을 놓지 못하고 남보다 우월해지려는 욕심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쉰다는 건 에고의 욕망이 허무하다는 걸 인식하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우리 마음,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안식이 없나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회당 안은 아버지를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안에서 쉼을 맛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마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도저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그는 몸과 마음이 다 구겨져 있었습니다. 그 장애인을 두고 팽팽한 두 시선이 교차합니다. 번뜩이는 선수의 눈과 쉼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 안에 모인 모두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는 말씀을 실행하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습니다.
그의 오그라든 손과 마음이 한꺼번에 모두 다림질을 받아 펴졌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제대로 된 쉼을 영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 선수들의 마음은 오히려 심하게 구겨져 버렸습니다. 제대로 쉬는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또 편안히 쉬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윤경재 요셉)
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고발하려는 적대자들 앞에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들어 위축된 이를 회복시켜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법을 매우 엄격하게 해석했던 다마스커스 학파와 달리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일지라도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견해에 비춰보더라도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주신 것은 율법을 어긴 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3) 하십니다. 이 대목에 매우 중요한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필이면 ‘안식일에’ 율법을 거슬러 치유를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안식의 참 의미를 깨우쳐주시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틀로 오염된 창조 때의 안식의 의미를 정화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쉬는 것이고 멈추는 것입니다. 쉬고 멈추는 이유는 생명이요 자유이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숨을 호흡하기 위해서이지요. 멈춤은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 나를 비우고 내 생각과 의지를 멈추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지점이 영원한 생명이 꿈틀거리는 지점인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십니다. 그는 손만 오그라든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영혼도 위축되어 있었고, 생명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절망과 체념의 섬에 고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그 사람의 인간적인 부족함과 잘못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내, 편견과 따돌림도 큰 몫을 하였을 것입니다.
‘일어나는' 동작은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을 전해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로 향하는 변화와 변형의 몸짓입니다. 일어나는 순간 이미 굳어진 그의 몸과 영혼은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운데로 나오라’는 말씀은 손이 오그라든 그가 변두리에 머물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그를 당신이 계시는 한복판으로 초대하신 것이지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초대한 ‘한가운데’는 회당의 한가운데 곧 하느님의 집 한가운데이며, '정의와 평화의 임금'(히브 7,2)이 계시는 곳이자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리이며, 모든 사람들과 언제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열린 만남의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로 나오라는 말씀 자체가 그에게 생명과 희망과 자유의 숨결을 불어넣어주고자 하시는 ‘거룩한 손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관대함과 자비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목덜미가 뻣뻣하고 마음이 고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그런 태도야말로 스스로를 손이 오그라든 환자가 되게 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을 저 변두리로 내몰아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숨을 쉬지 못하게 가로막고 말 것입니다.
이제 굳어진 사고의 틀과 선입견, 오만과 편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그런 오그라든 ‘죽음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바람 부는 변두리에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생명의 자리', 신명나는 축제 한복판으로 나아갑시다. 그곳이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유와 해방의 터, 생명과 행복의 못자리이기 때문입니다.(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예수님은 우선 손이 오그라든 이를 사람들 한복판에 세우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어찌보면, 우리 모두를 향한 “마음을 펴라” 란 말씀으로 들립니다.
휘파람새는 자신의
온 몸으로 노래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꼿꼿이 하늘로 향하고
양 날개는 물론 자신의 꼬리까지 퍼득이며
온 몸으로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뜨기 전인 여명에서부터
해가 진 다음인 일몰 후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그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휘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휘~~~~"
온 몸으로 주(인)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손에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오,구원자이신 까닭입니다.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채찍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 당신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 2017년 1월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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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묵]2017년 1월15일 주일 연중 제2주일 매일미사 묵상/개살구나무4장 (0) | 2017.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