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2월4일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위대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가 좀 쉬려 하셨으나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위대한 목자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3,15-17.20-21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의 명성과 권위를 맛본 제자들은 불철주야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쉼 없이 일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전부를 걸고 나선 제자들이 그 정도의 열정 없이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잊을 때가 있습니다. 노동이 인간의 가치를 확인해 주지만, 때로 인간이 노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규율 사회와는 달리 긍정성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피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할 것이 너무 많고, 좋은 것이 넘쳐도 우리는 선택 장애를 겪고,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누려야 할 하느님 안에서의 평화와 기쁨이 일과 노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송과 환대가 넘치는 곳을 떠나 ‘외딴곳’으로 가서 쉴 것을 명하십니다. 마치 예수님 자신이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아 칭호를 받을 때, 언제나 산속 깊은 외딴곳에 가시어 하느님을 만나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제물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잃을 수 있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되찾고자 욕망의 나를 벗어던진 참된 나를 찾고,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가엾은 마음’을 닮아, 참된 선행과 나눔의 가치를 찾아가는 ‘인생 피정’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시편 저자의 말씀처럼, 나에게도 주님 안에서 아쉬움 없는 쉼을 찾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서 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2.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3.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히브리서)
4. 신약의 찬미제사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호세14,3)’와
선행과 나눔의 거룩한 ‘삶의 열매(시편50,14.23)’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분별력(discernment)’을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 일컫곤 합니다.
삶의 균형과 조화가 깨진 혼란하고 무질서한 삶이라면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의 말마디도 그대로 통합니다.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
하여 분별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의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활동과 관상의 균형과 조화를 깨지 않았습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한국사회도, 한국교회도 고령화 되어간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 거스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도, 삶의 순간에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75살이 넘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도 불같은 젊은 시절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80살이 되어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도 77이 넘으셨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였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80살이 넘으셨지만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사제는 양 냄새가 나야 합니다. 거친 흙이 묻더라도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린 아직도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무뎌진 마음에 열정의 불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신학생 때 저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합니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핸드폰을 매일 충전하듯이,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듯이 교회는, 신앙인은 매일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돌아보면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라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후배들에게 맡겨도 된다고 핑계를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가 신문에서 읽은 글입니다. “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 蠟炬成灰淚始乾(납거성회루시건)” 뜻풀이는 이렇습니다.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그친다.’ 누에도 죽을 때까지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초도 눈물이 마를 때까지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다시 질풍노도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함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조재형 신부)
6.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구원을 볼모로 사람들을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얽매여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함께 계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직업적 율사와 제물 봉헌을 담당하는 직업적 사제들이 생기면서 된 탈선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이 세상의 원리를 적용하여,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제물 봉헌에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우리 욕심의 원리를 적용하여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하느님이 좋아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에 속한 분이었지만, 그분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눈먼 길잡이들”(23,16)이라고 그들을 혹평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율사와 사제들은 백성을 하느님에게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의 자녀로 살겠다는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살아있게 살아야 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거나,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들도 하느님이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에 대해 예수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마음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7. 쉼이란 단어는 휴식, 숨을 쉼, 하던 일을 멈추고 지내거나 그만두다 등의 뜻이 담겼습니다. 휴식이라는 한자 ‘休’와 ‘息’은 사람이 나무 그늘에 기대어(休), 숨을 코로부터(自) 몸 중심까지(心) 깊이 들이쉬는 것을 형상화 한 글자입니다. 일에 몰두하거나 힘에 부치는 일을 하면 숨이 가빠지게 되는 데 잠시 짬을 내어 가빠진 숨을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행위를 휴식이라 합니다.
또 휴식이라는 글자에는 ‘숨을 깊이 쉬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본다.’는 뜻도 담겼습니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혹시 그동안 실수한 일이라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벗어난 것은 없는지 반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휴식을 통해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단계로 올라서게 되면 곧바로 창의력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쉼을 통해 반성에서 창의력까지 얻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을 시인들은 ‘낯설게 하기’라고 부릅니다. 늘 대하는 평범하고 일상의 시각에서 벗어나 어떤 대상에서 낯선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시를 짓는 첫 번째 단계라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탁월한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자신의 진짜 능력을 알아채고, 부족한 점과 단점을 파악하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청취할 아량이 생기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휴식을 통해서 배우길 기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지금 우리와 달리 광야를 뜻하는 ‘eremos’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의 뜻을 쉽게 알아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광야에 나가서 하느님과 만났다는 역사적 교훈을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비운 자만이 광야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하고픈 일이 많고, 또 무슨 일을 해도 되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강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줄어드니 역설적으로 그 많은 상차림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해야 좋을지 모르는 ‘선택 장애’를 겪습니다. 그러면서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웬만한 자극에는 흥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지루함을 금세 호소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현대인을 ‘피로감과 지루함’이란 이중 중독에 빠졌다고 진단합니다.
휴테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김정운 명지대 교수는 ‘피로감과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처방을 3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단순한 것을 즐겨라. 둘째 마니아가 되어라. 셋째 감동을 주어라.
이제 천주교 교우들도 광야에 나가 악마와 부딪혀 보기도 하고, 그 실패와 승리 체험을 나누며, 성경 공부에 마니아가 되어 소그룹에서 우정을 나누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하는 성경 읽기, 묵상 나누기나 소그룹 취미활동 등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습니다.(윤경재 요셉)
8. 주님, 저 외딴곳에서 생명의 빵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당신의 그 간절한 사랑을 알아차리도록 잠에서 깨워주소서. 세상 물질과 욕망과 집착의 끈을 끊어버리고, 당신을 잊은 채 인간의 소리에 젖어 방황하는 저희를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외딴곳’으로 불러주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2월4일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에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마음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신약의 찬미제사는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호세14,3)’와
선행과 나눔의 거룩한 ‘삶의 열매(시편50,14.23)’를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의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활동과 관상의 균형과 조화를 깨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법을 휴식을 통해서 배우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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