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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4년 2월1일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매일미사 묵상/만첩홍도 4장


[매묵]2014년 2월1일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는 주님의 훈육을 견디어 내며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놀란 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ㅁ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훈육과 채찍질’, ‘책망과 낙심’, 듣기만 해도 맥 빠지는 단어들입니다. 누구나 훈계나 책망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나를 채근하고 독촉하는 소리를 들으면 낙심하고 맙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하고,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라고까지 격려합니다.
자신을 향한 비난과 책망을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변명과 합리화라는 심리적 자기 방어 기제를 동원해서 시련과 책망을 성장을 위한 훈육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미 굳어진 나의 고정 관념과 편견이 나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자렛의 예수님 동향인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미성숙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 온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큰 명망을 얻고, 권위 있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하다 보면, 함께 자라 왔지만 비교되는 자신들의 초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이 나를 움직일 수 있음을 믿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통이, 해이한 내 마음에 채찍으로 훈육하시는 하느님의 표징일 수 있고, 내 고집과 아집으로부터 풀려나 나를 변화시킬 이웃을 만나는 기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고집불통의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고집불통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 '이것이 걸어야 할 걸음이다.', '이것이 길이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을 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했던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바꾸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닫힌 내 마음으로 내가 들은 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 고집은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2.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은 모두 주님의 훈육으로 알아 견디어 낼 때 겸손입니다.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니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자기를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는 꼴을 못 봅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비교당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막상 도움을 받았어도 자신이 꿀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손실 기피심리가 여기서도 작동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맺자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마음을 닫았습니다. 마음을 닫은 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눈이 더 갔습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본문에 형제로 거명된 야고보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첫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이 모두 의인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AD62년경에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사랑과 충정을 보고 깨달아 변했듯이 예수님 부활 이후 많은 고향 사람과 친척들도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말하는 이 사건 이후의 일까지 통찰하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라야 성부의 오묘하신 뜻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스스로 정답을 내리려는 데에 걸림돌이 놓여 있습니다. 한 번 더 묻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 뜻을 따를 것인지,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인지.(윤경재 요셉)

4.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이태리 루이사 피카레타(1845~1947)의 '천상의 책', 루이사와 예수님과의
 대화중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나는 행하는 일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그가 어떤 뜻(지향)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지에 따라서 판단한다."(천상의 책 3-57,5)


 "딸아, 인간의 모든 일과 말과 생각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천상의책 7-41,2)


 "사랑하는 딸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그리스도는 불인지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의 일을
 태워 없앤 그것을 그리스도의 불이 하느님의 일로 다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나와 함께 일하여라.
우리 둘이 같은 일을 함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 받을 때에도 나와 함께 받는 것처럼 받고, 기도를 하든지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여라.

이와 같이 하면 인간적인 일을 완전히 잃는 대신
그것이 신적인 일로 변화되어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되리니,
오, 사람이 얼마나 무한한 부를 얻게 되겠느냐!
그러나 인간은 이를 활용하지 않는다."(천상의 책 7-46,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귀한 하루를 우리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과거에 나는 거의 모든 일을, 시간을, 무심(無心)코 무심(無心)히 보내왔다.
그 귀중한 시간들을 말이다.
바보같이...


잘 못 살아온 사실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바로
수많은 시간을 마음(心) 없이(無)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마음 없이 살아왔다"는 것은 혼(魂)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고,
혼(영혼)없이 살아왔다는 것은 움직이는 시체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과거에 나는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는 첫 순간부터 잠드는 그 시간까지,
잠이 든 후 잠자는 중에도 나의 모든 지향을
 하느님께로 향하며 살아간다.


잠자는 일도, 술 마시는 일도, 용변 보는 일도 다 하느님의 거룩한 일이
 된다. 그 지향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1분 1초라도 나를 떠나지 못하신다.
절대로 떠나실 수 없으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해욱 신부)

5. 신념고착은 자기 신념에 집착하여 충분한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나쁘게 보고 차별하고 비방하며 반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념고착의 예가 편견과 고정관념입니다.

편견은 불공정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태도를 말합니다. 고정관념은 직접 경험하거나 성찰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 또는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을 범주화하여 생각하는 고착된 사고방식을 말하지요. 신념과 편견 및 고정관념은 모두 태도나 생각을 경직시켜 불신의 원인이 됩니다.

신념이 아닌 믿음 안에 머물러야 하느님께서 일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신념은 자신과 지적 정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힘과 진리에 의존하나 신념은 자신의 힘과 경험과 지식을 신뢰하지요. 믿음은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력이 있으나 신념은 유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생명을 주는 믿음 안에서 눈을 뜨고 말씀에 순응하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도 신념고착에 빠지지 않도록 모두에게 열린 진리의 말씀과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 의탁해야겠습니다. 나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 순수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의 타자’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경험에 따라 변하는 신념에 매이지 않고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원과 사랑의 작업장’을 마련해드리는 우리였으면 합니다.(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4년 2월1일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 온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큰 명망을 얻고, 권위 있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칭송하다 보면, 함께 자라 왔지만 비교되는 자신들의 초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고집하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죄!
'아버지, 어떤 것이 길입니까?'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은 모두 주님의 훈육으로 알아 견디어 낼 때 겸손입니다.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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