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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2월7일 [(녹) 연중 제5주간 화요일]매일미사 묵상/모과나무 4장


[매묵]2017년 2월7일 [(녹) 연중 제5주간 화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시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복을 내리신 뒤, 이렛날에 쉬시며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꾸짖으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시편 저자의 기도에는 나약한 인간의 죄 성에 숨겨진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교만과 위선에 갇힌 인간이 절대 드릴 수 없는 기도이지요.
멀리서 찾지 않아도 내 주변에는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가까운 사람의 숨겨진 추악함과 가식을 느끼면, 우리는 관계에서 오는 자괴감을 견디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이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창세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당신을 닮은 모습을 심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다운 모습, 곧 인간의 죄와 고통, 위선과 탐욕, 죽음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만이 지니신 용서와 자비, 사랑과 나눔, 치유와 영생의 씨앗들이 심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관습과 전통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 온 율법의 정신을 하느님의 자유와 평화로 향하게 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형식 안에 가두어 두려는 위선적 태도를 비난하십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는 예수님의 비판은, 오늘날 교회조차도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혀 전례 형식주의나 교회의 사업과 관리에만 몰두하여, 정작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사목에 무관심해지는 바리사이들의 조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만든 규정들은 점차로 그들을 우월한 감정을 지니게 만들었고, 일반백성들에겐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감고 아웅 한다.’는 속담대로 시간이 흐르자 자기네들이 만든 규정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형시켰습니다. 인간의 법이 하느님의 법과 동등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지킨답시고 인간의 법을 만든 다음, 잠시 두 법을 동등하게 하고 결국에는 인간의 법으로 하느님의 법을 대체하면서 무력화 시켰습니다.
 
이러한 결과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기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힘 있고 법을 아는 자들은 언제나 사회적 법규와 제도들의 빈틈을 노리기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코르반(성전재산, 봉헌물)선언 규정입니다. 한 번 코르반하고 선언하면 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유리할 때 그 선언을 취소하고 원상으로 만들면 그만이었습니다.

유다 율법규정은 무려 613가지나 되었습니다. ~하라는 긍정형 구문이 248가지, ~하지 말라는 부정형 구문이 365가지입니다. 365는 일 년의 날수와 같습니다. 248은 인간 몸의 뼈 숫자라고 합니다. 율법이 원래는 더 많았었는데 이것도 중세 때 수비학자인 어느 랍비가 수비 이론에 맞추어 정리한 것이라 합니다. 
예수께서는 초심을 지키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율법 규정을 핵심 정신만으로 정리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요한은 아예 하나로 합쳤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윤경재 요셉)

2.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주, 성단, 은하, 은하계, 태양계, 지구입니다. 역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전선하십니다. 규모도 크고, 우리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으십니다. 지구에는 특별한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번식하고, 스스로 보존하고, 후손을 남기는 생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는 사람이 랜드마크, 베스트셀러, 국보 1, 18과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우주를 생각할 수 있는 지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할 수 있는 오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그렇게 수가 늘어났고,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은 아니기 때문에 역사 앞에서 많은 오류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만의 명예와 능력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며,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피부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당했고,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해서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존재의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 아무리 마음이 좋고 열심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고 외적인 활동이나 종교적인 예식에만 얽매여 있을 때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성찬 예식에 참석하는 크리스천은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을 과감하게 부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랑의 신비야 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이고 관습인 것이다.(유광수 야고보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씻는 인습에 관한 논쟁(1-7절)과 코르반 인습에 관한 말씀(9-13절)을 통해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의 삶과 그리스도교인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치십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나는 어떤 시각을 지니고 살아가야 할지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며 따집니다(7,2.5). 유다 전통에 따르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장터에 다녀왔다면 몸까지도 씻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7,8)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크르반 서원’을 악용하여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리는(7,9) 행위를 질책하십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에서 벗어나 재물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착오를 지적하신 것이지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통과 형식, 율법준수에는 몰두하면서 사랑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태도, 자기 기준에 따른 긍정의 시각과 긍정의 힘에 대한 의존이 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요?

긍정적 사고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것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나만을 위한 긍정적 사고는 결국 무신론적 자기만족과 이기적인 행복에 지나지 않으니 헛되고 헛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자신의 성공과 만족, 또는 사람을 제외한 율법의 준수에 초점을 둔 빗나간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긍정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하시고 “복을 내려주신”(창세 1장)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좋으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2월7일 [(녹)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영혼 안에 당신을 닮은 모습을 심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다운 모습,
곧 인간의 죄와 고통, 위선과 탐욕, 죽음의 한계를 넘어
하느님만이 지니신 용서와 자비, 사랑과 나눔, 치유와 영생의 씨앗들이 심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관습과 전통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는 예수님의 비판은,
오늘날 교회조차도 전통이라는 이름에 갇혀 전례 형식주의나 교회의 사업과 관리에만 몰두하여,
정작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사목에 무관심해지는 바리사이들의 조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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