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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2월9일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모란 4장


[매묵]2017년 2월9일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주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온갖 생물을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 이름을 붙여 주게 하시고, 사람을 잠들게 하신 다음 갈빗대를 빼내 여자를 지으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간청한 이교도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수치심’은 인간의 자존감을 지키는 심리적 방어 기제입니다. 누구도 숨기고 싶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거나, 지켜야 할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내 몸이 발가벗겨지거나, 사생활의 비밀이 남김없이 알려지는 것도 참기 힘든 수치심을 일으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당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어서 결국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이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심지어 개로 비유하며 멸시했던 민족 출신의 부인입니다. 이 부인이 예수님께 절박하게 청한 것은 더러운 영에 들린 자신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수치스럽게 거절당할 것임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 앞에 엎드린 것은, 당대의 위대한 예언자로 소문난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도 있었겠지만, 더러운 영에 들려 날마다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딸을 치유해 주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냉대가 의외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볼 수 없는 믿음을 이 이교도 여인으로부터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상 아래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는 강아지가 되더라도, 예수님의 치유만 일어난다면 그 어떤 수치심도 견뎌 내겠다는 어머니의 믿음이 보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에서, 죄를 짓기 이전에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인류의 첫 조상들의 순수함이 엿보입니다. 믿음은 하느님 때문이라면 모욕적인 수치심도 기쁘게 견뎌낼 수 있는 당당함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순교는 세상 것을 잃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일상의 결단일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티로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 생활의 자세인가? 마치 유대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태도는 다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고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있는 귀중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기도하자.(조욱현 토마스 신부)

2.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경멸하여 부르던 “개”에 비유된 것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강아지에 비유된 것이지만, 거절당한 것임에는 확실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순간입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우리의 간청이 거절당하면 참으로 찹찹해지곤 합니다.꼬인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꼬여갈 때는, 하느님의 냉정함이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단순히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무시당했다고 여겨지고 배신감마저 들면, 상처입고 실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바로 이 순간,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도록 눈물겹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강아지”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진정, 자신이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비록 강아지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은혜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의 은혜가 아닌, 오로지 당신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절당하면서도 주님의 자비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같은 상 아래에서 동시에 먹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예수님의 때를 불러옵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했습니다.마치 ‘아브라함이 희망 없는 데서도 믿어서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듯이’(로마 4,18 참조), 여인은 자비 없는 데서도 믿어서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자가 아닌, 완전한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저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3.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주님!
 거절당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이
 당신께서 저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믿음과 사랑을 더 깊게
 끌어당기심을 알게 하소서!
 
 하오니, 주님!
 거절당할 때에도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이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인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며 기대하는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천하고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한 여인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은 드러납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5. 인생의 목적은 대다수가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에서 깨달은 내면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양심과 진실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말라. 이렇게 산다면 인생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법정 스님의 잠언집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무엇이 되어야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런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할까요? 비교하는 삶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어떠한 삶이든 상관없이 내 자리에 충실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빠다킹 신부)

6.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모든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그러나 혼자만의 믿음은 없습니다. 
관계속의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부인은 곧바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대로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 부인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딸의 치유를 갈망했기에 어머니의 이런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참 냉냉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우선적 대상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멸시의 대상인 강아지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모멸감을 갖게 하는 말씀인지요. 
자비로운 주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시련이자 유혹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믿음은 자기비움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희망입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희망했기에 이교도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주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문득 생각나는 게 이미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이란 곡이었습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 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하나 남았네.”

이교도 부인의 위대한 점은 자존심하나 까지 버렸다는 것이니 그 믿음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참으로 믿음 있어 자존심을 비울 때 세상 풍파 속에서도 참나의 '믿음의 전사戰士'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으로 자기를 이겼고, 마침내 주님을 이겼습니다
참으로 이교도 부인은 믿음의 전사戰士입니다
부인의 믿음에 주님의 은총이 더하여 마귀는 떠나갔고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기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믿음이 전제됩니다.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런 구마이적을 통해 부인의 주님과 믿음의 관계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7. 예수님의 우선순위를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병든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8.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이토록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입술로는 공경하면서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섬긴다."라고 말씀하셨던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들과 이 여인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안에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것은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즉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먼저이고 나중이고, 거짓이고 진리인지를 구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이런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어리석은 이"라고 하였다.

그럼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어리석음은 어둠이다. 어둠은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니까 구분할 수 없다. 매일 보아도 그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그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헤매다가 구렁텅이에 빠지고 넘어지고 그래서 상처투성이가 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마르 4,12)고 하였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까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귀머거리, 소경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고 말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깨달아야 한다. 즉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고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이 곧 어둠을 제거하고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마르7,18)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깨달음은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안에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주어지는 은총이다.(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9.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고서 마귀를 쫓아내주십니다(7,29). 이교인의 땅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 망설이고 계실 때, 이교인 부인은 확고한 믿음을 통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메시아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을 감동시켰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이교인의 땅으로 가시어 스스로 나서지 않으신 까닭은 일종의 ‘수동적 기다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시고 그들 스스로 마음을 열고 구원의 샘이요 메시아이신 당신을 인정하고 다가올 여백을 주신 셈입니다. 이렇게 보편적 구원은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다면 문자를 떠나 문자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생활과 신념과 습관을 담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경계에 매이지 말아야겠지요. 인간 중심의 경계선 장애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감동시키고 움직여 참 해방을 맛보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사랑이 꿈틀거릴 수 있도록 나를 얽매고 있는 것들로부터 떠나 기쁘게 구원의 샘물을 퍼마시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처럼 ‘다가가’ ‘그분의 발 앞에 엎디어’ 생명과 자유와 희망을 갈구하는 목마름의 날이였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10. 하느님의 인호와 자취가 렷하게 이마에 새겨진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 마다 그 장소를 정화시키고 성화시키지는 못할망정, 훼손시키고 더럽히는 존재로 살아간다면 이 땅에 온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돌게 하는 ‘명품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 따뜻해지는 그런 단어들이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메아리치고 실현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좋은 생각들, 순수함, 나눔, 배려, 진실, 겸손, 지혜, 너그러움, 온유, 친절..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17년 2월9일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부인은 곧바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간절한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 부인은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딸의 치유를 갈망했기에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참 냉냉합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교도들은 멸시의 대상인 강아지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모멸감을 갖게 하는 말씀인지요. 
자비로운 주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시련이자 유혹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믿음은 자기비움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희망입니다. 
주님을 믿었기에, 희망했기에 이교도 부인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주님의 자비를 간청합니다. 

이교도 부인의 위대한 점은 자존심하나 까지 버렸다는 것이니 그 믿음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참으로 믿음 있어 자존심을 비울 때 세상 풍파 속에서도 참나의 '믿음의 전사戰士'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으로 자기를 이겼고, 마침내 주님을 이겼습니다
참으로 이교도 부인은 믿음의 전사戰士입니다
부인의 믿음에 주님의 은총이 더하여 마귀는 떠나갔고 딸은 치유되었습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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