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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2월11일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공조팝나무 4장


[매묵]2017년 2월11일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는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너 어디 있느냐?”는 부름에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다고 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고 흙을 일구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엾이 여기시고 빵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게 하시어 사천 명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오늘의 묵상
굶주림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가 넘고 싶은 가장 큰 과제입니다. 현대 사회가 비약적인 농업 혁명과 과학 혁명으로 굶주림을 해결해 냈지만,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는 굶주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근 성인품에 오르신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는, 지구상에 가난한 이들이 이토록 많은 이유를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는 모두 압니다. 문제는 나눔의 범위를 인맥과 민족, 이념과 체제의 굴레에 가두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과, 제자들이 가진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신 행위 이외에, 구체적으로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빵이 남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 명을 어긴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과 대조됩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은, 자기 책임을 그럴듯하게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합리화하는 아담과 하와의 이기적인 마음과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고 땅을 일구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고달픈 운명이 주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군중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이기심과 탐욕에 물들어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의 물음으로 되새겨 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선천성 소아마비로 태어나 평생 스스로 바로 앉아보지도 못하고, 학교에는 가 본 적도 없고, 누가 가정교사로 옆에서 가르쳐준 사람이 없는 여인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야기입니다. 시인은 누구를 탓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시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는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조재형 신부)

2. 구약과 두드러진 차이는 예수께서는 빵을 나누시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모세와 엘리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하나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빵을 나누는 기적이 ‘Ritual(전례의식)’이 되었습니다. 리추얼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정한 행동을 뜻하는데 겉모습은 습관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과 의미는 다릅니다. 습관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행동의 반복에 지나지 않으나 리추얼은 일정한 의미부여정서적 반응이 동반됩니다. 종교적 리추얼은 공동체 의식과 더불어 마음이 고양되고 감동하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전해집니다. 리추얼은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확고하게 하며 재생산 합니다.

또 예수님의 행위는 시선처리가 남달랐습니다. 나와 네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주보면 질투와 시비와 전쟁이 유발됩니다. 설득과 대화도 마주보면 한쪽이 포기하기 전에는 끊임없이 지속될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서로 마주보는 것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3의 지향점을 같이 바라볼 때 평화와 사랑과 우정이 지속되며 또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게 됩니다. (윤경재 요셉)

2017년 2월11일 [(녹)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과,
제자들이 가진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었는데,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고, 빵이 남기까지 했습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성녀는,
지구상에 가난한 이들이 많은 이유를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나눔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는 모두 압니다.
문제는 나눔의 범위를 인맥과 민족, 이념과 체제의 굴레에 가두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군중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이기심과 탐욕에 물들어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에게 던지시는 하느님의 물음으로 되새겨 볼 때입니다.

아멘...수산나 -

@@@나 남이 갖고 있지 않는 것 가졌으니/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 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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