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2월13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아담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카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농부인 형 카인은 화가 나서 양치기인 아우 아벨을 죽인다(제1독서). 바리사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15.25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세상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증적인 증명을 통해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하여 얻은 실천적 지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자는 논리적 방식의 실험을 통해 얻은 자연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문명사회를 낳았고, 후자는 논리보다는 추론과 경험을 통한 인격적 친교로 얻은 신뢰에 기초한 다양한 형태의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 냈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증명되고 확인되어야 진실이라고 믿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형태의 믿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정말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라면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가치들, 곧 그들이 신뢰하는 방식으로만 진실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만 좇아 정작 우리 삶을 둘러싼 기적들을 보지 못하는 세대들에 대한 탄식이 들립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하느님의 표징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이 바친 제물을 다르게 받으셨을 뿐, 아벨을 카인보다 더 사랑하고, 카인을 미워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이는 카인이 범죄한 뒤 두려워 떨 때 그에게 표를 찍어 주시어 목숨을 지켜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카인의 죄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 쫓고,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죄를 짓고도,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양심을 거스른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우리 삶의 작은 기적들입니다. 내가 숨쉬고, 살아가는 순간이 기적이고, 내 마음 하나 추스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미움의 나락에서 용기 있게 손을 내미는 순간 얻는 평화야말로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참된 표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표징을 보이며 살라고 부르시지 않으실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카인도 마찬가지였지요. 농부인 카인은 주님께서 양치기인 동생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자 몹시 화를 내며 머리를 떨어뜨립니다(창세 4,3-4). 그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주님께서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시자 화를 낸 것입니다.
카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눈길을 두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성취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의 욕구를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뜻을 앞세우며 살았던 것이지요. 그 결과 동생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머리를 떨어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찾아야 할 진정한 표징은 기적이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갈망해야 할 진정한 표징입니다.
오늘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 성찰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 기도하면서도 실은 내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자신을 바라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맡겨야 하는데 내 안위와 성공과 세상적인 만족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한 하느님께서 자비로 베푸시는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나만의 표징만을 바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 버리실 것입니다.”(8,13) 하여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망합시다!
세상의 귀한 물건들과 권력과 명예,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결과물들, 시선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는 세상의 현상들에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찾는 표징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통을 품고 견뎌냄으로써 모두를 사랑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찾는 참 표징입니다.
영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홀한 신비체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 눈물 흘리는 성모상, 예수님 얼굴이 나타난 강론대, 오상 체험, 방언, 초월적인 치유와 같은 특이한 현상이나 표지들을 찾아 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현상에 있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 ‘왜,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부질없는 물음입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니곤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경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족할 줄 아는 게 믿음입니다.
3. 생각의 전환, 인식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땅에 있지만 우리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시간을 향해 나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은 병원과 의사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 적당한 운동, 규칙적인 식사,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건강을 유지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면 병원과 의사의 처방은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카인은 동생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제사를 잘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현상만을 보고, 원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인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트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원인은 동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인 자신의 행동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카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의 평수를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대학입학을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본당 신자들의 숫자를 가지고, 본당의 헌금액수를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남편의 수입을 가지고 비교하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내가 얼마나 충실한가입니다.
집채만 한 고래도 아주 작은 꼴뚜기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원하는 바리사이파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비교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엘리야 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분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상대평가를 하는 눈으로는 사랑으로 오시는 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입니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017년 2월13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그들이 요구한 표징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찾아야 할 진정한 표징은 기적이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야말로 갈망해야 할 진정한 표징입니다.
나만의 표징만을 바랄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가 버리실 것입니다.”(8,13)
하여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핵심적이며 궁극적인 목표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갈망합시다!
우리가 찾는 표징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통을 품고 견뎌냄으로써 모두를 사랑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찾는 참 표징입니다.
‘왜,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부질없는 물음입니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경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족할 줄 아는 게 믿음입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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