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2월17일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려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며,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례로 충만한 구원을 이루시니,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바벨탑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창세기의 이야기입니다. ‘혼란’, ‘흩어짐’의 뜻을 지닌 ‘바벨’이란 말 속에는, 에덴 동산의 범죄 이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담겨 있습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써서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는 인간의 오만함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시고 그들의 말을 섞어 흩어 버리십니다.
인간이 신과 같아지려는 욕망은 신화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제4차 산업 혁명’ 또는 ‘제4의 물결’로 불리는 기술 융합과 인공 지능 개발을 통해 인간이 ‘정신’을 창조하려는 새로운 바벨의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 과학이 발전하고, 로봇이 일상의 많은 영역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오면 인류는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 혁명의 혜택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대에 자산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가 되기 쉽습니다. 공정한 분배와 올바른 민주 의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기술 과학의 혜택 역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첨예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내 목숨을 구하려고 남을 짓밟는 일이 반복되는 한, 인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만 잘살려고 하면 이 세상은 ‘혼란’, 곧 바벨의 역사를 반복하고 맙니다. 내가 죽기로 작정하고, 내가 숨기고 싶은 나의 약점, 곧 십자가를 짊어질 때 이웃을 용서하고, 공감하며, 공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벨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서로 짊어져 주는 나라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주님!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도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당신을 통하여 사랑하게 하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고통을 가슴에 품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사랑의 십자가 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2.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는 이들이 하나로 모인
참 답답하고 막막한 맹목적盲目的 획일적劃一的 집단입니다.
두렵고 외롭기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인간의 근원적 정서입니다.
마침내 주님은 파멸의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현장에 개입하셔서 성읍을 쌓는 일을 중단시키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림으로 모두를 살려 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생명의 길을, 획일적 집단이 아닌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의 길을 보여줍니다.
외적으로 바벨탑을 쌓는 삶이 아니라,
내적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3. 신학생들과 30일 피정을 할 때 ‘두개의 깃발’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데 일상의 삶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화려하지도 않고, 재물도 적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에는 겸손, 십자가, 나눔, 희생, 양보, 봉사, 가난한 이, 헐벗은 이, 아픈 이들이 가득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기쁨, 감사가 있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이 무척 힘이 듭니다.
반면에 사탄의 깃발은 오늘 제1독서에서 본 것처럼 높이 솟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이 있고, 쾌락과 즐거움이 있고, 끊임없이 올라갈 수 있는 욕망의 계단이 있습니다. 권력과 재물을 유지하려는 사람과 그 권력과 재물 때문에 착취당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성공이라는 마차에 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미다스의 손,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욕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멀어지게 합니다. 욕망은 결국 커다란 상처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지금은 비록 꽃이 아니라도 험난한 세상을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는 거름이 되는 길이 있음을 말해 주십니다. 세상은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말씀을 남겨 주신 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 톤즈 공동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선종하신 고 이 태석 신부와 같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서신 분들입니다. 이른 아침입니다. 나는 어느 깃발 아래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4.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프란치스코 살레지오 성인(1567-1622)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이해욱 신부)
5.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위험은 예수님이 제시한 길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자기 생각을 갖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는 잣대가 되고 우리 안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기준이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작아진다는 것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려고 하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위대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눈에 귀중한 존재이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실현된다.
누구를 눈치보고 또 누가 이야기를 하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되고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체면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와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6.이냐시오는 궁금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다른 감정이 솟아오르는 까닭을. 자신의 온몸을 감싸는 ‘황량’과 ‘위로’의 차이를 묵상하던 이냐시오는 이 둘의 차이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곧이어 ‘영적식별’을 위한 ‘영신수련’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위로’를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이 미세한 차이를 식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새 출발을 위해 몬세라트 수도원을 향해 떠났습니다.
1522년 봄 어느 날 이냐시오는 만레사 근처 카르도네르 강변 어느 동굴에서 ‘조명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그의 삶과 기도의 주제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잠시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오랜 기간 철학과 신학공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동안 갖은 오해와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오직 순명과 정결과 청빈 그리고 식별의 은사에 매달렸습니다.
“자신을 버리고”라는 그리스어 동사의 본래 뜻은 ‘부인한다(aparneomai)’는 뜻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거짓된 생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 목숨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제 것이라는 거짓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도 자기 안에 들어온 모래알을 품고 묵상을 하면서 진주층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목숨이 제 것이라는 거짓 속에서는 오직 침울함과 황량함만 느낄 뿐이었습니다. 결코 영적 위로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위로를 통하여 깨달은 영적식별과 영신수련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고, 그것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품안에서 키웠던 영롱한 진주를 온 세상에 내보였습니다.(윤경재 요셉)
7. 우리의 성소는 기쁨입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입니다. 이 여정이 바로 제자뿐 아니라 군중까지도 행복으로 이끄는 예수님 추종의 길이지요. 오늘의 말씀들은 왜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8,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데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두 가지입니다.(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2월17일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바벨탑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서로 짊어져 주는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생명의 길을, 획일적 집단이 아닌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의 길을 보여줍니다.
외적으로 바벨탑을 쌓는 삶이 아니라,
내적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
‘두개의 깃발’이라는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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