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2월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고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다며, 아벨과 에녹과 노아를 보기로 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깨닫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7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3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 ‘본다는 것’은 내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으면 내 눈앞에 나타나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본 것이 전부이고, 내가 보지 않은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편견과 오해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걸리는 덫이고,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편협한 사람들이 빠지는 늪입니다. 편향된 시각을 지닌 매스미디어, 곧,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편견의 늪에 빠져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몇몇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 그 어떤 눈으로도 볼 수 없는 놀라운 환시입니다. 거룩함의 매혹은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엉뚱한 청을 하게 만듭니다. 사실 엉뚱하다기보다는, 그 놀라운 감동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솔직한 표현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영광을 보려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 이후에서야 깨달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내가 보는 것도 전부가 아님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는 길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은 탐욕과 불신에 빠지면 볼 수 없는 세상 너머의 다른 세상을 보는 마음의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눈을 감을 때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가끔은 세상을 향하던 눈을 감아 보십시오. 보지 못했던 믿음의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바쳤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들어 올려지기 전에 이미 그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1,8-9).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웃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이익을 도모하여 오히려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로마15,1-2).(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 오늘의 복음이 언급하는 높은 산,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것, 옷이 빛나고 흰 것, 구름 속에서 나는 소리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이미 사용한 표상(表象)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구약성서의 그런 표현들을 가져와 이야기를 꾸민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합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이스라엘 신앙의 시조(始祖)가 된 분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만으로써 설명이 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닮은 분이지만,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보태어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깨닫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자인 왕 파라오와 함께 계시지 않고, 천대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도하여, 이집트에서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그 거사(擧事)의 성공은 하느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해주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그런 해방과 구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분”(탈출 33,19)으로 체험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행하신 일들이 과거 모세가 깨달은 하느님,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으며,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죄책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그들이 자유롭게 또 보람 있게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도 실천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원초의 체험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왕과 사제들은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치부하고, 대우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의 횡포에 맞서서 그들을 비판하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선포한 사람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회상하면서 그분 안에 과거 예언자들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은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심판하실 무서운 하느님을 말하면서, 그들도 남을 심판하는 높은 신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자각하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성전이 사람을 단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그것들은 하느님을 알리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짐스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체험하고 가르친 하느님을 깊이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는 데에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고, 그분의 일, 곧 하느님 나라의 일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그분의 일을 온 몸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자기 자신을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군림하려 하지 않고, 섬기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실제로 실천하셨습니다.(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3.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가르침을 새겨봅시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고생하고, 섬기고, 멸시받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십시오.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빵이신 분이 배고픔을 느끼기 위해서 내려오셨으며, 생명이신 분이 긴 여정의 피로를 느끼고자 내려오셨고, 샘이신 분이 목마름을 느끼기 위해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대 자신의 이익을 찾지 마십시오. 그대 사랑을 지니십시오. 그리고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평화가 깃든 영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78,6)
[매묵]2017년 2월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예수님이 다볼산에서 변모하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에게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엾이 여기시고 돌보아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의 하느님을 전파하고자 순교를 불사하였습니다.
고생하고, 섬기고, 멸시받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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