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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3월1일 [(자) 재의 수요일]/보로니아 1장


[매묵]2017년 3월1일 [(자) 재의 수요일]


오늘 전례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 위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 오늘은 사순 시기의 첫 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임을 일깨워 줍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오늘,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을 힘차게 시작합시다.

본기도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가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하오니, 극기로 보루를 쌓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엘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예언한 뒤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여 주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주님은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신 분이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간곡하게 권고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되며,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자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 단식의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신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스스로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기도할 때에도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식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 아니라 숨어 계신 하늘의 아버지를 향해야 한다(복음). 

제1독서 <너희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 요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2-18
제2독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영성체 후 묵상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에서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 시기에, 죄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회개와 보속의 삶으로 맞갖은 준비를 합시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묵상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사람이 흙에서 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장에는,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생명은 오로지 하느님께 달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라는 표현에는 인생의 덧없음도 함축되어 있지요.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늘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려면 하느님께서 처음 빚어 주셨던 그 원 상태에 가까워야만 합니다. 그 원 상태는 한마디로 순수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던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하였습니까? 하느님께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순수함을 잃으면 힘마저 잃게 됩니다. 남의 눈치만 보게 되며, 뒤에 숨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모습만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중대한 일을 결단해야 할 때 순수함 하나로 극복했던 경우도 많습니다. 순수할 때만이 주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며 힘을 주시기 때문이지요. 이번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초심을 잃지 말고 더욱 순수해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게시판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 내가 하는 일을 떠벌리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 하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조욱현 토마스 신부)

2.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개는 구약성경 히브리어에서 ‘슈브(shub)’인데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앞으로만 수레를 몰고 가다가 밀쳐난 하느님께로 다시 돌려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저 한 번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는“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듭 되돌아가는’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입니다. 수도승들은 이를 제2서원으로 행하고 살아갑니다. 곧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을 채택하고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가 요청됩니다. 결국, 회개란 다시 그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요?(이영근 신부)

3, 주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반영억 라파엘 신부)

4. 겸손은 "기름진 땅"이라는 라틴말(Humus)에서 나왔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5.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 축일을 앞두고 사흘을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실천하며 특별하게 보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실천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자, 교회는 이 사흘의 실천을 40일로 늘렸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사순(四旬) 시기입니다. 그들이 40일을 택한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였다는 복음말씀이 있고, 우리도 예수님의 그 고행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사순 시기의 역사가 이렇게 긴 반면에, 재의 수요일 역사는 짧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재를 뿌리는 오늘의 전례(典禮) 15세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재는 인생이 덧없음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우리는 머리에 재를 뿌리면서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창세기(3,19)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선과 악의 최종 기준으로 삼고 살고자 하였을 때,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이 그 안에 불어 넣으신 하느님의 숨결이 사라지면, 재와 같이 허무한 인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숨결, 곧 성령을 모시고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그때 한, 그 약속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성령이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실천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며, 모든 일을 우리를 기준으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나의 편안함, 나의 미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을 잘 가꾸어서, 우리 자신이 중요하게 평가되게 살았던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들의 중심이 되어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성공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재물도 모으고, 지위도, 권력도 얻으려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도,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와 같은 성공을 얻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대우받도록 해 주는 하느님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재와 같이 헛되고 헛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당신의 숨결을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결심을 유도하는 오늘의 전례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이 진흙을 빚어 사람의 모상을 만드시고, 그 코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더니,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인간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창세기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창세기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면, 하느님의 숨결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셔서 제자들에게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20,22)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숨결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실천하면서 그분의 숨결을 삽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고,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일, 곧 주변의 생명들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당신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여,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그것을 위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부터 사람들에게 권장된 것이 단식과 자선과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 세 가지를 가식(假飾) 없이, 진실 되게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시게 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세 가지 수행(修行)입니다.(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6. 음허화동은 우리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 혼과 육인 에고가 궁시렁거리는 것입니다. 에고는 늘 자신의 경험치를 최고 진실인양 확신하고 삽니다. 내안의 참나인 영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에고는 습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습니다. 습관은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본능에서 쌓인 것이기에 여간해서는 바꾸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진짜 주인공인 하느님의 성령을 모르는 체하게 되고 자기주장을 우선으로 내세웁니다. 마치 가장 어리석은 자가 가장 똑똑한 체하는 짓과 같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성령의 움직임에 의탁할 때 가장 좋은 에센스가 모이고 성장 호르몬이 왕성해진다는 걸 깨우쳤으면, 잘난 체하고 궁시렁대기 좋아하는 에고더러 입 다물고 순순히 영의 뒤를 따르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탄받는 위선자들의 행동은 모두 자신이 옳고 최고인줄 아는 에고에게 주인공 자리를 빼앗겨 버린 어리석음 때문에 나왔습니다. 위선자들은 다른 위선자들의 행동을 금세 파악합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으려 하거나 나팔을 불면, 곧바로 서로 시기하고 뒷담화를 해댑니다. 그러니 에고가 원하는 상을 받을 수조차 없습니다.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헛바람만 채우게 됩니다.
 
위선자들이 행하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주듯 에고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방향이 다릅니다. 자신의 에고를 먹여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에고를 점점 작게 축소시켜 결국 예수님 안으로 편입되고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골방은 겉으로 드러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내면은 아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외딴곳입니다. 자유와 독립성이 유지되는 마지막 터전입니다. 오로지 순수한 영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에고란 놈이 폭력으로 그 자리를 강탈하려 듭니다. 에고는 영의 명령을 들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신이 좌지우지하려고 설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복음서 구절 중에 가장 난해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교회 역사상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초기 수도승들은 이 구절을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해 단호하게 결심한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해석하여 고행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셀름 그린 신부 등 현대 영성가들은 폭력을 쓰는 사람들이 왕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방해하기 위하여 왕국을 빼앗아 간다.’라고 해석합니다. 가톨릭 새 ‘성경도 그런 뜻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내부에도 있습니다. 내부의 적은 가장 은밀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사실조차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내부의 적은 혼과 육을 부추깁니다. 네가 네 몸의 주인이니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꼬드깁니다.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정말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용한 전략도 결국은 네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본보기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악마의 두 번째 유혹방법은 근심걱정입니다. 악마가 제일 손쉽게 쓰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이겨낼 방법도 쉽습니다.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 유혹의 소리가 들려올 때 ‘몰라’ ‘괜찮아하고 소리 내어 읊조리면 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근심걱정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성경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얼른 영의 처소인 골방으로 들어가 성령의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청종(聽從)해야 합니다. 평소에 영의 목소리를 듣는 훈련을 통해 영과 에고를 확실히 구별하고 감히 에고 나부랭이가 골방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영은 언제나 진리와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윤경재 요셉)


7. 회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회개란 그동안 굳어진 습관, 사고의 틀, 왜곡된 신념 등으로 형성된 자아를 완전히 해체하는 ‘죽기 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세상과 창조질서를 회복하며, 묵은 자신에 죽어 새롭게 태어나며, 인간관계를 성사적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주님께로 돌아가려면 ‘옷이 아닌 마음을 찢는’(요엘 2,13)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하고 통렬하며,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하는 회개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준다는 것이지요. 회개는 세 가지 면에서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먼저 철저히 회개하려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세상 창조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이신 하느님의 손길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삶이 모든 것이 주님 사랑의 열매이며, 매순간 그 사랑을 숨쉬며 살아감을 인정할 때, 우리는 진정 마음을 찢는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완전한 의식으로 "마음을 다하여"(요엘 2,12)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 사랑의 빛으로 자신의 어둠을 비추어봐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이요 선 자체이신 하느님과 비교할 때, 나의 어둠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성찰하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빛을 갈망하고 사랑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흙으로 되돌아갈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께 맡겨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이 바로 회개이며 자신을 되찾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인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고(5,20), 하느님의 은총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6,1).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헛된 욕구와 갈망을 정화하며,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웃과 화해하고 정의를 실천하도록 힘써야겠지요.(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3월1일 [(자) 재의 수요일]
오늘의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거듭 되돌아가는’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입니다. 수도승들은 이를 제2서원으로 행하고 살아갑니다.
곧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을 채택하고 살아갑니다.

회개는 뉘우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가 요청됩니다.
결국, 회개란 다시 그분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멘...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