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17년 3월4일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매일미사 묵상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살피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오른팔로 보호하여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네가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투덜거리자,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9ㄷ-14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ㄴ-32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생명의 천상 양식으로 힘을 얻고 비오니, 이 세상에서 받아 모신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레위도 남다릅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 출신 제자들은 밑져야 본전이었지요. 예수님을 따랐다가 여차하면 다시 고기잡이를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사정이 달랐지요. 이제 다시는 세리라는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로서는 배수진을 친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세례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레위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안정된 직업은 잃었지만, 대신 삶의 의미를 찾았지요. 이런 모습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나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라는 자만심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문제없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요소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늘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마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반복해서 범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 캐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의 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번 사순 시기에 힘껏 노력했으면 합니다.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제1독서)
2.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나 또한 나설 필요는 없다.(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3.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안식일의 두 가지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이 되면 장사하는 분들이 물건을 더 이상 팔지 않고 남은 물건은 가게 밖에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가지고 가서 안식일을 지낼 수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의 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호텔에서 본 것입니다. 안식일용 엘리베이터는 모든 층에서 정지를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 합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서도록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해는 가지만 그것이 진정 안식일의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고 합니다. 본질은 보지 않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뜻합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기 때문에 편협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을 작은 율법이라는 그물에 가두려고 하기 때문에 오해와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조재형 신부)
4. 예수께서 사람과 사건을 바라보시는 관점은 바리사이나 우리와 매우 달랐습니다. 바리사이와 우리는 사물과 인물의 겉모습만 훑는데 반해 예수께서는 사물과 인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시고 그의 인간됨과 고민을 한꺼번에 살펴보셨습니다. 그의 가능성을 열어보셨습니다. 잠자는 그의 영을 흔들어 깨우셨습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는 늘 아득한 낭떠러지가 놓여있습니다. 예수님 말씀과 행동은 물음표 투성이입니다. 매일같이 성경을 펼쳐 읽어도 온통 수수께끼뿐입니다. 아득한 절벽이 생깁니다. 낭떠러지 이쪽에 선 우리는 건너 쪽을 향해 예수의 이름만 부를 뿐입니다. 주님! 주님! 그렇게 목 놓아 외칠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어디 출신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신분은 어떠하며,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그걸 따졌습니다. 그래서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다른 세리와는 식탁에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달랐습니다. 그런 외면의 모습 모두를 무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든, 세리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여인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영을 일깨우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넣었던 ‘하느님의 모상’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세리 레위를 마치 깨어진 창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병든 이와 죄인 하나를 용서하고 어루만지면 더는 범죄가 번져나가지 않을 줄 아셨습니다. 죄인을 방치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이라고 우리에게 외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 레위는 깨어진 마음을 추스를 힘을 얻었습니다. 자기 내면에서 용솟음 치는 어떤 빛을 느꼈습니다.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 덕분에 한순간 모든 움직임은 정지되고 온 우주에 오로지 예수님과 자신 단 둘만이 서 있다는 체험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확 달라졌다고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년 교육을 담당하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정신은 ‘교육이 아니라 영성’을 일깨우는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가르침이 말이 아니라 ‘마음’이여야 하고, 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을 체험하게 하여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영성에 있다는 것을 돈 보스코 성인께서 예수님을 통해 배우셨기에 이런 정신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살레시오 정신은 ‘나를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내게도 다가왔다’는 체험의 기회를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격을 지켜줄 경제적 도움과 인격적 지지를 베풀어야 합니다.
살레시오 수도회 김용은 수녀는 수도회의 이런 정신을 ‘3S’를 들어 설명합니다. 나를 깨우는 생각의 영성인 STUDY. 행복을 부르는 마음의 영성인 SMILE. 평범을 비범하게 하는 행동의 영성인 SERVICE. 이 세 가지 영성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영적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던 예수님의 언행을 본받았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신을 깨우친 성인들의 생활이 모두 여기서 출발하였습니다.
(윤경재 요셉)
5.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으시려고 어부 몇을 제자로 가려 뽑으신 다음, 이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5,27-2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제자들을 뽑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받던 죄인 레위를 부르십니다.
사실 레위의 부르심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재물과 권세에 애착을 두고 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돈을 생각하고, 돈으로 더 큰 권세를 누리는 일에 골몰했을 것입니다. 사람보다도 돈의 단맛에 길들여진 채 자신만만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그의 삶은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옵니다. 그가 소유하고 향유해왔던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일시적인 재산포기 그 이상으로 전인격적인 변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재물과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이로운 체험을 한 탓이었을까요? 그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죄인들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일상은 이렇듯 기쁨 넘치는 축제의 연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2) 죄인으로 배척받던 세리만이 아니라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역시 회개해야 할 죄인들임을 깨우치신 것입니다.
주님, 사람과 일과 돈에 대한 애착의 끈을 붙든 채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모든 것을 버린 채 일어나 당신을 따랐던 세리와 같은 회개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6. 우리에게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겪는 광야입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喪失)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는 그분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2017년 3월4일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오늘의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레위도 남다릅니다.
오늘 레위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안정된 직업은 잃었지만, 대신 삶의 의미를 찾았지요.
이런 모습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나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라는 자만심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문제없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요소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늘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마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반복해서 범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 캐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의 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번 사순 시기에 힘껏 노력했으면 합니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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