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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17년 3월5일 [(자) 사순 제1주일]매일미사 묵상/유럽피나무 2장


[매묵]2017년 3월5일 [(자) 사순 제1주일]매일미사 묵상


▦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인간 본성이 원죄에 물들어 나약해졌음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말씀의 사순 시기의 여정에 나아가게 하시어,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러 성령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빚으신 사람이 뱀의 유혹으로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눈이 열려 알몸인 것을 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단식하신 뒤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지만 성경 말씀으로 이를 물리치신다(복음).

제1독서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9; 3,1-7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2-19<또는 5,12.17-19>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11

영성체 후 묵상
▦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금력과 권력과 명예로 우리를 유혹할 때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가라.”고 단호히 외치며 이렇게 고백합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심하게 느끼시자, 달콤한 유혹이 들어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유혹은 늘 당사자의 입장을 합리화시켜 줍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친다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습니까? 일단 먹고 기운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십시오.” 물론 먹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돌로 만든 빵을 먹을 수 있습니까? 부정직하게 번 돈으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또다시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경향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유혹입니다. 땅에 엎드려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내가 찾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주님 뜻에 맞추려 하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내 뜻에 따라 주어야 만족하는지?’ 이 점을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신앙생활의 불편함,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떨쳐 버리고 신앙생활의 장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늘 떠올려야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굿뉴스 우리들의 묵상 발췌글>
1.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는 유혹
물질적 유혹입니다. 빵에 대한 유혹이요, 필요와 효용성, 소유와 능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육신을 살리는 물질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성벽에서 뛰어 내려라. 그리고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유혹
정신적 유혹입니다. 영예에 대한 유혹이요, 과시와 인기, 교만과 허영,영웅주의에 대한 유혹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허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의 뜻 이루어지기를 바라라는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 4,7)

 “이 세상 왕국을 모두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유혹
영적, 신앙적 유혹입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지배와 권위, 존경에 대한 유혹입니다.
우상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하느님께 속한 이로서 그분만을 섬기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이영근 신부)

2.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따르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 받는 인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자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 16)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인간은 그 공간이 주는 제약을 넘어서 마음대로 살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얻어서, 더 뽐내며 살겠다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세 번째의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 1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며,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의식주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들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위해주고 도와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것들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초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유혹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빵만 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궁리만 하고, 부귀영화만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둔 사람이 찾는 것들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인은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겨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환상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인 형제자매를 섬깁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겪는 광야입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喪失)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는 그분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305)

3.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은 파스카를 향해 정향되어 있다. 이 사순절의 긴 여정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40이란 숫자는 성서에서 볼 때, 하느님과의 만남에 앞서 갖게 되는 특별한 긴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간 광야에서 헤맨 것(신명 8,2-4), 모세가 산 위에서 보낸 40주야(탈출 34,28; 신명 9,9),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밤낮으로 걸어간 40(1열왕 19,8)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주위와 자신의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사순절 동안 우리를 내적 순례를 통해 우리의 과월절 양’(1코린 5,7)이신 그리스도와의 기쁜 만남에로 초대하는 것이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 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마태 27,42 참조).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조욱현 토마스 신부)

4. 베드로를 통해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외치며 사탄을 물리쳤고 그 이후로도 유혹은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가까운 이웃들을 통한 악마들의 유혹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은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ㄷ).

예수님 역시 끊임없이 유혹을 겪었지만 악마의 유혹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광야여정 인생도 죽는 순간까지 악마의 유혹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정말 죽어야 끝나는 광야여정이요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최상의 무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튼튼한 영육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만을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래야 사람입니다.
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이 길뿐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사순 제1주일 미사를 통해 우리를 당신 성령과 말씀의 은총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마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5. 이처럼 인간의 인격은 처음부터 완전할 수 없습니다. 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격은 성장해야 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조화나 균형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고정된 라디오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롭게 변화되는 주파수를 찾아서 다이얼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기마땅히 되어야 하는 자기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갈등하게 되고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라는 유혹을 겪게 됩니다. 유혹은 옳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만드는 내적, 외적 힘입니다. 하느님으로 향하는 마음을 주저하게 만들고 하느님으로부터 어긋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유혹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 긴장은 죽기까지 해소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조건을 지니고 강생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악마를 처음 만난 곳은 광야였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와 싸우셨습니다.
 
악마의 이름은 세 가지였습니다. 빵과 권력, 그리고 신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악마의 도전을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는 할 수 있습니다. 유혹을 벗어나는 길은 언제나 하느님께로 방향을 잡음으로써 해결된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힘입니다. 용기를 북돋우며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보아 주는 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윤경재 요셉)


6.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결론은 물에게 사랑한다, 감사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잘 될 거야.’라는 이야기를 하면 물의 모습이 아름답게 변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물에게 미워한다, 짜증나, 너 때문이야, 너는 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를 하면 물의 모습이 일그러진다고 합니다. 사람은 몸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사람에게 사랑한다. 고맙다, 잘 될 거야, 너는 할 수 있어, 다음에 하면 되요.’라고 말을 하면 사람의 몸도, 마음도 아름답게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와 마음입니다. 내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처음 사람에게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로 유혹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을 해석하고 식별하면서 성장합니다.’ 첫 사람이 아는 것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7. 오늘 제1독서는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을 거부하고 죄의 어둠에 떨어지는 인간상을 보여줍니다(창세 2,7-9; 3,1-7).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가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어 그 근본을 망각하고 부정하는 교만,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기 것을 챙기려는 이기심이 가장 근원적인 죄입니다.

교만에 빠진 사람은 하느님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과 악의 구별을 자신이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내려주시는 주님”(마태 5,45)을 무시하고 선악을 구분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입니다. 선악의 구별은 서로 편을 가르고, 싫음과 좋음에 따라 달리 대하며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켜 사랑과 평화를 사라지게 할 뿐입니다.

에덴 동산은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 내 삶의 현실 한복판입니다. 그곳은 일상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태초의 고귀한 존재로 부르시는 빛의 자리요, 하느님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갈등하고 넘어지는 어둠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지점은 그래서 은총과 생명의 계기요, 회개를 시작해야 할 내 인생의 변곡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들을 전하면서(4,1-11) 하느님을 향한 참 신앙의 길을 알려줍니다.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라는 것, 곧 하느님을 내 생각 안에 가두고 영적 능력을 현세 재물을 얻는데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으로, 하느님을 떠보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 보다 물질과 권력을 중요시 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유혹과 시련과 고통의 바다 한복판 내 인생의 사순절을 사는 우리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권력과 재물과 명예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쳐야겠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미미한 흙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의 숨결을 받아 그 생명을 살아야 할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며,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아름다운 우리가 되도록 내 영혼을 가지런히 챙겨야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사탄은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유혹하지 않아도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작은 마귀인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죄를 안 지으면 마귀가 직접 덤빌 것입니다. 마귀들도 이기면 사탄을 맞서야하는데 예수님 정도나 돼야 마귀 우두머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유혹은 그 자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유혹받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도 유혹 받으라고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도구로 쓰시려고 하는 이들을 부르실 때 언제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쌓도록 교육하십니다. 모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부합니다. 파라오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주제에 어떻게 파라오를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힘으로 모세가파라오를 이기게 하십니다. 사람이 파라오를 이겨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길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파라오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되셔서 사탄을 이기셨기에 사람인 우리들도 이길 수 있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죄를 이기셔서 당신 자신이 죄를 아셔야합니다. 운동을 할 때 상대를 이겨보지 못하면 상대를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언제라도 상대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 상대가 이정도였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또한 유혹에 떨어지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숲을 벗어나야 숲이 보이는 법입니다. 죄를 이겼다면 죄에서 벗어난 것이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다른 이들도 구해 낼 수 있습니다.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습니다. 이제 이 신부님은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물론 남도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겨보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도 이기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게 됩니다. 피해만 주게 됩니다. 이것이 유혹과 끝까지 싸워내어 맛보아야 하는 기쁨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유혹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쳐서 결국 자신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신 이유는 광야의 삶이 유혹을 이기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 자체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광야입니다. 죄를 짓는 것을 보고는 인간적이라 하지 말고, 죄를 이겨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하라고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장 행복한지도 아십니다. 노예보다 자유인이 행복하고, 자유인만이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예의 종살이를 벗어나봅시다. (전삼용 요셉신부)


2017년 3월5일 [(자) 사순 제1주일]
오늘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형제자매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들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위해주고 도와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것들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초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유혹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빵만 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궁리만 하고, 부귀영화만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둔 사람이 찾는 것들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 자체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광야입니다. 죄를 짓는 것을 보고는 인간적이라 하지 말고, 죄를 이겨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하라고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노예보다 자유인이 행복하고, 자유인만이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습니다.
노예의 종살이를 벗어나봅시다.

아멘...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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