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심화반 제11강 글짓기 <나이>]
2012년 12월27일 광화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1961년 쌍둥이 건물로 지어진 2개 동 중 한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한다. 한 개 동은 주한미원조행정처(USOM), 다른 하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로 사용했다가 1963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면서 경제기획원,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정부청사로 활용하던 건물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된 것이다.
지금 내 나이는 만 63세, 1953년생이다. 1960년에 수송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졸업했고, 집은 내수동이었다. 내수동 집에서 수송초등학교까지 등하교하면서 이 쌍둥이 건물 앞을 자주 지나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깃든 건물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되고, 개관 전시에 지인이 관여했다는 말을 듣기도 하여 반갑고 정겨운 마음에 2013년 1월8일에 관람하러 갔다. 관람하면서 그곳 전시물의 20%는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건이고, 80%는 내 삶의 궤적과 함께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예심화반 제10강 글짓기 숙제의 글감 <나이>를 쓰는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전시물을 참고하면서 나의 나이에 따른 사회의 양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6.25 전쟁(1950.6.25-1953.7.27)이 휴전이 되고 4개월 후에 나는 태어났다. 그 때는 제1공화국 시대로 이승만 정권이 통치하던 시대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4.19 학생혁명(1960.4.19)이 일어났다. 그 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집에서 일하는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 언니 손을 잡고 좁은 골목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렬로 지나는데 주변의 경계가 삼엄하여 심상치 않았던 기운을 느꼈다. 신신백화점과 화신백화점 사이의 큰 도로 횡단보도를 건너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쪽의 내자동 길을 가는데 짱돌이 던져지고 대학생 같은 사람들 여러 명이 다급하게 뛰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스치듯 보아서인지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리지 못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 때 그 상황이 4.19 혁명 때의 일이었나 보다고 기억했다. 일 년 후인 5.16 군사정변(1961.5.16)에 대한 기억은 집에서였다. 대문과 가게 문이 닫힌 적막한 거리를 군인들이 행렬지어 지나가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 사건 역시 4.19 혁명처럼 전혀 떠오르지 않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 때가 5.16 군사정변이었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제5대 대통령 선거(1963.10.15)가 있었다. 제2공화국(1960-1962) 대통령이었던 윤보선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후보의 대결 구도였다. 박정희의 선거 구호가 “황소처럼 부려보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학년 동무(그 때는 친구를 동무라고 불렀다.)와 함께 집으로 귀가하는 하교 길에 윤보선이 좋다. 박정희가 좋다. “황소처럼 부려보자.”가 무슨 말이냐며 왈가왈부 했던 기억이 또렷이 난다.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1963.12월-1979.10월)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을 거쳐 17년 7개월을 장기 집권 했다. 나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서 직장생활을 할 때까지 대통령이었다. 1976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4년차 일 때 출근을 하여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선배 동료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1979.10.26)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건이 터져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1학년인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광부와 간호사가 파독되어 이들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한 돈이 총 1억 달러가 넘었다고 한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는 1964년~1965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64년에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어 1973년까지 8년간 이루어졌다. 나보다 6살 위인 오빠의 친구들이 베트남으로 파병되어 엽서 등을 보내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8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70년 7월 완공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완공한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민교육헌장(1968.12.5.반포)을 암송하여 선생님께 검열 받던 기억이 난다. 교련교육의 시작(1969년)이 고등학교 1학년, 새마을 운동(1970년 4월22일)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되었다.
1972년 10월에 유신헌법이 개정되어 1979년 10월 박정희가 시해되기까지 7년간을 유신정권이라고 하며 제4공화국 시절이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유신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간선제로 바뀌고, 대통령이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통치체계의 변화로 사실상의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100% 득표율로 2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972년, 1978년). 이런 상황이므로 대학생활 4년 내내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 소재 여자 대학을 다녔는데, 매학기 후반부는 4년 내내 휴교였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대학 내 다락방이라는 동아리에서 성경 공부를 했다.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모여 데모 비슷한 모임이 있었는데, 내가 속한 다락방 회원들 거의 모두가 무대로 올라와 열변을 토한다. 그 때의 문화적 충격이 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으며, 아는 것이 없으므로 꿀 먹은 벙어리 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직장 4년차 일 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1979.10.26.)되고 최규하 대통령 체제(1979-1980)가 잠시 있었으나, 대통령 시해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1979.12.12)으로 군부를 장악,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로 군을 동원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전국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체포하였다. 다음날, 5월18일 광주에서는 계엄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 시민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살상하였고, 이에 시민들이 무장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에 밀려 후퇴한 계엄군은 수일 뒤 시내에 재진입하여 시민군을 무자비하게 폭행 구타하고 잔인하게 탄압하여 5월27일에 끝냈다. 이런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던 광주사태를 전두환 대통령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국민들을 눈멀고 귀 멀게 하였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100%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1980.8.27)되어 헌법 개헌을 했다.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강제 해직을 단행. 유신헌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7년 대통령 임기의 단임제와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 새 헌법을 공포. 이듬해 대통령 간접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에 다시 당선(1981년 2월)한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1980-1988)이 8년간 이어진 것이다.
전두환 정부의 철권통치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계속 일어났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뇌사한 사건이 터지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450만에 달하는 학생 시민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저항에 굴복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1987.6.29.)을 발표하였다. 16년 만에 대통령 직접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는 줄어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의 민주헌법으로 개헌. 5년 단임제의 직선제가 된 제6공화국이 시작되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제1공화국~제6공화국, 제1대 이승만~제18대 박근혜 대통령까지 11명 대통령의 바뀜을 보았다.
1972년 대학을 입학 할 무렵에서 1987년 6.29선언 때까지 장장 15년여 세월을 대학생 데모를 보면서 살았다. 내가 결혼해서 살았던 시댁이 혜화동으로 성균관 대학 주변이었다. 직장에서 퇴근하여 귀가할 때면 최루탄으로 인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는 저들이 왜 그렇게 데모를 하는지 확실하게 몰랐다. 막연하게 박정희의 장기 집권, 전두환의 삼청교육대, 언론 통폐합 등 독재 정치 때문에 데모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광주사태에 대한 내용을 몰랐으니 할 말이 없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 한 명은 남편이 데모의 선봉자였다. 감옥에 갇힌 남편 옥바라지를 몇 년, 감옥에서 병이 들어 요양원에 들어간 남편 뒷바라지 몇 년, 그리고 고인이 된 남편의 산소 방문이 몇 년이라는 그 친구의 체험기를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새삼 난다. 본인과 본인 가족의 안위를 뒤로 한 채 많은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찾아주기 위하여 노력했던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면서 겸허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 2017년 2월4일 토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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