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심화반 제12강 글짓기 <고향>]
고향이 무엇인가를 인터넷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모두 4 가지이다.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4.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1번의 내가 태어난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다. 아버지가 이천 세무서에 근무하여서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3살 연상인 언니 말에 의하면 컴컴해지는 저녁 무렵 엄마의 진통이 시작되어 밤 9시경에 나를 낳았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다. 나보다 3살 위인 오빠는 약간의 기억이 있는 듯하다. 집 앞에 멀리 역전이 보였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 이천 역 근처에서 옛날의 그 집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이천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일가붙이로 부터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지만, 이천 소리를 듣거나 이천 근처를 지날 때면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추억으로 떠오른다. 엄마는 아빠가 이천 세무서에 근무할 때 세무서장의 옷빔을 책임지어 대주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 시절에 옷빔은 대단히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특히 솜옷의 옷빔은 품이 더 많이 들어갔다. 더러워진 옷은 모두 뜯어서 솜을 빼고 해체하였다. 해체한 옷감을 잿물로 애벌빨래를 한 후에 양잿물을 넣고 삶아서 헹구어 빨래 줄에 널었다. 빨래가 마른 후에 풀을 멕여서 다시 말리고, 꾸덕꾸덕 할 때이거나, 아니면 물을 뿌려서 빨래를 접어서 발로 밟은 후에 다림질하였다. 이후 솜을 집어넣고 다시 꿰매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엄마가 호롱불 밑에서 했다고 한다. 이런 공로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종로 세무서로 전임이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 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사를 했다.
따라서 1번의 내가 자란 고향은 내수동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1~2년 전 무렵에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서울 사대문 안, 종로구 내수동에서 자랐다. 수송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빨간 색 원피스와 빨간색 구두를 신고 왼쪽 가슴에 길게 접은 손수건이 달린 명찰을 달고 13살 연상인 언니와 함께 입학식에 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앞은 아스팔트 도로였다. 아스팔트 도로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 사방치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등을 했다. 아스팔트 도로에 비석치기의 금, 사방치기 그림, 땅따먹기 한 땅의 경계 등을 석필로 그렸다. 이외에 ‘우리 집에 왜 왔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다방구’ 등의 놀이를 했다. 술래잡기를 할 때는 전봇대에서 술래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열까지 센 후에 이곳저곳에 숨은 친구들을 찾았다. 그 시절에는 여자와 남자의 놀이가 어느 정도 구분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오빠가 하는 제기차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등의 놀이는 하지 않고 구경만 했다. 남자끼리 하는 이 놀이는 여자인 나를 끼워주지 않았고, 나도 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끔 3살 위인 오빠를 선두로 동네 친구들과 함께 멀리 놀러 간적도 있다. 사직공원과 그 뒤의 인왕산, 남대문을 지나 남산 공원까지 놀러 갔다. 사직공원은 오빠 없이 내 또래의 여자 친구들 끼리도 자주 갔다.
2번의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고향은 서울 사대문 밖의 하왕십리에 소재한 친가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던 하왕십리 친가를 가려면 내수동에서 금강제화 등의 구두점이 즐비하였던 새문안로에서 전차를 타고 갔다. 친가에 대한 기억은 엄마가 시집살이 했던 서러움을 책으로 엮으면 한 권도 넘을 것이라고 간간이 들려주던 간접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것 보다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에 3달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직접경험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그 무렵 별안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홀로 계신 할아버지 수발과 돌아가신 할머니 상식을 모시라는 특명을 받고, 3살 위인 오빠와 함께 친가로 파견되었다. 초등 6학년생인 내가 고사리 손으로 부엌에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그럴듯하게 3첩 반상을 만들어서 대청마루 뒤주에 설치된 상청에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할아버지 밥상을 차려 드렸다. 내가 부엌에서 상을 들고 할아버지 방으로 갈 때면 세 들어 함께 살았던 아주머니께서 “곧잘 차렸네.”하며 칭찬을 해주시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수염을 길게 길렀으며 유난히도 질은 밥을 좋아하셨다.
3번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고향은 장위동 외가이다. 현재 장위동은 서울특별시 관할 구역이지만, 내가 어릴 때 장위동은 경기도 땅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여름방학에 장위동 외가로 놀러가서 한 달 내내 놀다가 피부가 새까매져서 내수동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난다. 집에 오면 아버지가 어김없이 “아버지가 보고 싶지도 않았니.”하면서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장위동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외가 옆의 큰 대문을 가진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나랑 동갑인 외사촌이 제사 음식 나눔을 할 때 받으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 당시는 12시 땡 칠 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12시까지 졸음을 참고 기다렸다가 외사촌과 함께 옆집 큰 대문 앞으로 갔더니 우리 같은 아이들이 이미 줄을 서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제사 음식을 받았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음식을 받았는지 기억이 없는 것이 아쉽다. 사대문 안 내수동 우리 집에서의 향수 보다는 4학년, 5학년 여름방학 한 달씩 지냈던 장위동 외가에서의 기억이 짧지만 더욱 강렬하고 깊으며 그리운 향수로 내 마음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인공적인 아스팔트 도시형 문화보다는 흙 내음과 생명을 품고 있는 원초적인 자연의 문화가 인간의 본성에 더 깊이 각인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곤내라고 부르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에서 멱을 감고 송사리 잡아 고무신이나 손으로 만든 작은 웅덩이에 풀어놓았던 일, 빨래해서 모래사장에 널어놓으면 짧은 시간에 뽀송뽀송하게 말랐던 그 감촉 등이 지금 생각만 해도 좋다. 서울내기인 나는 메뚜기, 방아깨비, 개구리 등을 잡는데 서툴렀지만 이런 것들을 잘 잡는 시골 아이들이 신기하여 잘 따라 다녔다. 3살 위 오빠가 소곤내 개천에서 작은 삼태기를 풀숲에 바짝 들이대며 미꾸라지, 모래무지 등을 잡을 때는 깡통을 들고 신나게 쫓아 다녔던 기억이 강렬하다. 솟구치며 뛰어 오르는 빙어 비슷한 물고기를 오빠가 몸을 날려 그물로 잡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외가집 근처 오솔길 변에 피어 있던 환삼덩굴과 보라색 쑥부쟁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장 놀랐던 기억은 홍수였다. 내 기억에 소나기가 잠깐 온 것 같은데, 오솔길 주변의 깊지 않았던 계곡에 황토물이 불어 무섭게 흐르는데, 돼지와 지붕 등이 떠내려오는 모습은 지금도 충격이다. 그리하여 소나기가 잠깐만 와도 빠른 시간에 물이 불어났던 그 때의 영상을 떠올리며 물난리를 연상하는 버릇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4번의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고향은 1997년 10월 경 이사 와서 20년째 살고 있는 '천당 밑의 분당' 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으로 계속 분당에 살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분당이 제2의 고향 이예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2017년 2월7일 화요일...수산나 -
수원 봉녕사 다보탑 닯은 석탑
수원 봉녕사 비로자나불
수원 봉녕사 석가탑 닮은 석탑
수원 봉녕사 비로자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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