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심화반 제14강 글짓기 <강가의 사찰 여주 신륵사>]
문예심화반 제13강 글짓기 숙제의 글감이 '강'이다. 단번에 떠오른 것이 '여주 신륵사'이다. 2014년 11월5일에 답사를 가서 촬영한 사진을 내 블로그에 올린 것을 보고 복습을 하면서 이 글을 쓴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 속에 있는데 비하여 보기 드물게 강가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륵사 진입로에 원호 장군 전승비가 서 있다. 그는 여주에서 태어난 무사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패주하는 관병과 민병 등 300여명을 규합하여 신륵사의 팔대 숲 일대에서 도강하는 왜병을 섬멸하고 구미포에 집결한 왜적을 새벽에 기습하여 몰살 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같은 여강(남한강) 일대에서의 전투는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할 정도로 무인지경으로 북진하던 왜적을 육전에서 격파한 최초의 대승이다. 파죽지세에 당하기만 한 줄로 알고 있었던 임진왜란 육전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반가우면서 고맙다. 여주 신륵사 팔대 숲의 승전을 앞으로 잊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결심을 하지만 기억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자신은 없다.
'봉미산 신륵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통과하고 '아와 흠 금강역사'가 양쪽 대문에서 눈 부라리고 있는 불이문을 통과하며 걷는데,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 기분이 좋다. 강가의 보제루에 앉아서 일단 강바람을 여유 있게 느꼈다. 보제루에서 내려와 맞은편의 비석 군을 일별하고 중심가람 쪽으로 들어가는데, 평탄한 지형에 전각 등이 배치되어 있어 환한 햇빛을 그대로 내 몸에 받는 기분이 삼삼하다. 우물에 해당하는 세심정을 지나니 범종각이다. 범종각에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사물전이 있다. 그 옆에는 구룡루가 있다. 신라 진평왕 시기에 원효대사가 절을 지었을 무렵에 9마리 용이 하늘로 날아간 후에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구룡루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앞쪽은 ‘구룡루’, 뒷쪽은 일주문 편액처럼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 기이했다.
구룡루 앞에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이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이 많은데, 이곳은 특이하게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보전이다. 조선시대,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세종대왕의 극락왕생을 빌라는 왕가의 명령이 작용 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유서 깊은 고찰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륵사에는 모두 8개의 보물이 있다. 극락보전 불단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과 극락보전 앞의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이 보물이다. 다층석탑은 대부분의 탑들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하여 자연환경에 약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상륜부 역시 결실되어 안타까운데, 탑의 아래 부분 몸체에 섬세한 필치로 조각된 용과 구름문양이 아름답다.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했다는 곳에 세워진 3층 석탑 뒤로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이 있는데, 벽돌을 구워서 만든 중국식 탑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탑이다. 이 탑 때문에 신륵사를 탑사, 탑절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옛날에도 이국적인 것은 사람들에게 빨리 각인되어 별명이 붙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뒤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가 있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인쇄하여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연유를 기록한 비이다. 대장각은 명부전 근처에 2층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자취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신륵사라는 이름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잡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나옹은 인도 승려 지옹의 제자로 공민왕의 왕사였으며 무학 대사의 스승이었다. 그가 회암사의 주지로 있을 적에 밀려드는 신도로 인하여 우왕이 그를 밀양 형원사로 가게 하였는데, 병이 깊어 가는 도중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의 문도들은 남한강변 절벽 위에서 다비식을 하고, 이를 기념하여 육각 정자를 짓고 그의 당호를 따서 강월헌이라 부르고 3층 석탑을 세웠다. 강월헌에서 남한강을 바라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앉아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강 위로 황포돛배가 다니는 풍경을 만끽했다. 나옹 선사의 유명한 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명월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욕심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바람같이 구름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를 속으로 음미했다.
여주 신륵사의 보물 8개 중에 절반인 4개가 나옹선사와 관련된 보물이다. 그의 정골 사리를 봉안한 부도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나옹의 묘법과 영정을 모신 진당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석종 주변을 밝히는 보제존자 석등 (보물 제231호)이 신륵사 뒤편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조사당(보물 제180호)인데, '지옹-나옹-무학'의 3화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회암사지터에 답사를 갔을 때에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지옹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안내문을 주의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신륵사 답사를 하면서 내가 또 반한 것은 수령 600여년의 노거수 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수령이 600년 이상 된 노거수를 바라보면 그 순간 얼음이 되는 것이 나의 습성이다. 울림이 커서 말문이 닫히기 때문이다. 신륵사에는 모두 3그루의 노거수가 있다. 조사당(보물 제180호) 앞에 용틀임 한 듯한 향나무.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으로 가는 길에 있는 참나무, 구룡사 좌측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로 은행이 열리지 않는데, 용문사 은행나무와 암수로 짝을 이룬다는 풍문이 있다. 불교의 불, 법, 승을 의미하듯 세 줄기로 자라난 은행나무의 중심에 관세음보살이 나투신 것으로 보이는 형상은 신비롭기까지 하여 더욱 유명하다. 드물게 강가에 있는 사찰 여주 신륵사. 대리석 석탑과 전탑, 나옹선사 석종 등 보물 8개가 있고, 노거수 3그루가 존재하는 그 곳의 모습이 내 눈에 아련하다. 어느 날 다시 가서 노거수 참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그 정체를 밝혀야겠다.(2017년 2월11일 토요일)
은행나무에 나투신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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