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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지식·재테크·화장실

[북스]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박재순 지음/개갓냉이 2장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저자
박재순 지음
출판사
바오로딸 | 2001-10-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월간 야곱의 우물에 연재된 현직 교수의 해설글 모음집. 욥기의 ...
가격비교




박재순 지음. 바오로딸.

"편견과 욕심에 사로잡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사물이건 하느님이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한쪽만 보거나 일그러뜨려서 본다. 언제나 보는 사람의 관점이 대상을 지배하고 왜곡한다. 그래서 '바라봄의 횡포'가 저질러진다. 바라봄의 횡포에서 벗어나려면 보는 자와 대상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유로운 깨달음의 경지일 것이다. '바다를 대상화하여 보는 자에게는 바다가 평화, 경이, 장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바다와 일체가 된 물고기에게 바다는 물, 생명의 품이다.' 물고기가 바다와 어우러지듯 우리도 바라보는 객체와 어우러질 수 있을까?"

 

욥기에 관한 묵상.  제목이 맘에 들어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맘에 드는 구절 하나를 고르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위 구절이 가장 맘에 남는다. 하느님과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저 경외의 대상이나 위로, 평화를 주는 대상이 아니라 내 생명의 품이신 분으로... 하느님과 마주 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 살아 숨쉬어야 할텐데...

바다가 좋아 바다로 가는 이유는... 단순히 바다를 바라보면서 여전히 눈앞에서 만족하려고 가는건 아닐 것이다, 성심. 바다에 간다는 건 바다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바다를 안다는 건 파도치는 걸 구경하고 갈매기 소리를 들으며 감상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바다에 발을 담그다가 서서히 바다에 들어가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겠지...

하느님 안에서 헤엄치자, 성심!

 

"예수는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 했다. '사람의 아들딸'이 아닌 이가 어디 있으랴! 평범한 산골 나자렛의 평범한 사람 예수는 평범했기 때문에 삶의 중심을 볼 수 있었다. 게으른 특권의식 버리고, 공허한 관념의 세계도 버리고 예수는 평범한 삶 속에서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볼 수 있었다."

역시 내 신랑, 멋있다^^

 

2007.1.24.



출처: http://singthelord.tistory.com/130 [깊이에의 강요]



욥기의 배경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착하고 경건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더구나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욥과 같은 사람이 왜 그런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욥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의문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생활을 비롯한 수많은 외부의 침탈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의 의문이기도 하였다. 욥기는 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 이처럼 억울한 고난을 한 두 번도 아니고 끊임없이 당해야하는지 의문을 풀 수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삶의 밑바닥에서 온 몸으로 고난을 겪고 깨달은 진리를 기록한 책이다.

2. 욥의 친구들의 말

욥기에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 빌닷, 그리고 소발이 등장한다. 이들은 말은 언뜻 들으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과연 그 말을 하는 친구의 의도가 과연 건전한지, 그리고 그 말이 고난을 당하는 욥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인지가 문제이다. 당연해 보이는 말 속에 음모가 숨어있고, 옳은 듯 보이는 말에 비수가 숨겨있다.
엘리바스는 이렇게 말한다. 잘 생각해보아라.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일이 있더냐? 내가 본 대로는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더라.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얘기이다. 사실 그렇다.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면 마땅히 콩 심은데 콩이 나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고 곧은 사람의 영혼은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푸르게 자라고, 거짓과 미움으로 사는 사람의 영혼은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말라버려야 한다.
하지만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힘없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생명을 살리는 원리이지 결코 생명을 죽이는 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리가 지금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은 죄인이고,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주장으로 둔갑하면 저주와 죽음의 원리가 된다.

빌닷은 말한다. 네가 정말 깨끗하고 정직하기만 하면, 주께서는 너를 살리시려고 떨치고 일어나셔서 네 경건한 가정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처음에는 보잘 것이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 만약 이 말을 함께 고통과 죽음의 자리에 서서 손잡고 생명의 길을 헤쳐가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득권자나 지배자가 현세에서 고생하더라도 잘 참고 기다리면 이승에서는 복을 받을 거라고 한다면 이 논리는 압박자들이 피압박자들을 순응시키는 논리이며, 인도의 1억이 넘는 불가촉 천민을 가두는 논리가 된다. 처음에는 작지만 나중에는 크게 된다는 생명의 논리는 가장 작은 이들,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았던 세리와 창녀, 과부와 어린이, 정신질환자들과 장애인들, 잃은 양과 같은 이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았던 예수의 입에서 나올 때 참으로 뜻이 있다.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연 예수님이시다. 자기를 크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큰 것만 쫓는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불행해진다.

3. 온 몸으로 하느님을 찾는 욥

욥은 친구들의 비난과 구스르는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욥은 이제 이 정도까지 되었으니 하느님께 받은 만한 죄를 받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자책감에 빠지지 않는다. 욥은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받아줄 하느님을 찾는다. 마치 엄마에게 매를 맞는 아이가 엄마의 치마를 움켜잡고 오열하듯이 하느님을 붙들고 있다. 욥은 하느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이든 오려거든 오너라. 나 이를 악물고 목숨을 내걸고 맞서리라./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 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온 발자취를 그에게 낱낱이 밝히리라. 나의 육체가 썩어 문드러진 후에도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땅이여, 나의 피를 덮지 말아 다오. 나의 부르짖는 소리가 쉴 곳을 마련하지 말려무나. 보아라. 지금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데 있다. 내가 하느님께 눈물을 쏟을 때 나의 마음을 대변할 자여, 이웃과 이웃의 시비를 가리듯이 사람과 하느님 사이를 판가름하여 다오.
욥은 온 몸을 던져서 자신의 결백을 부르짖고 이를 증명해줄 보증자를 찾고 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친구 세 사람과 엘리후의 그럴듯한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와서 마음 속으로 느끼고 알아주는 이가 있어야 욥은 살 수 있다. 삶의 문제는 결국 나와 하나님의 문제로 좁혀지는데 하느님은 영 직접 대답을 아니하신다. 이 때 예수처럼 상처받는 사람을 하느님 앞에 세우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언하는 보증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욥의 이런 절규와 바램 속에 결국 예수가 오셨다.

4. 하느님의 대답

욥에게 침묵하시던 하느님께서 드디어 대답을 하신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기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네가 언제고 동이 틀 것을 명령해본 일이 있느냐?
너는 낚시로 레비아단을 낚을 수 있느냐? (레비아단이) 너와 계약을 맺고 종신토록 너의 종이 될 듯 싶으냐?
이제까지 욥은 억울하다고만 호소하고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하느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느님의 응답이 없자 옳고 그름을 따지자며 하느님께 대들었다. 그러니 욥에게는 평안도 기쁨도 없었다. 제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탄식하며 노여워하며 싸우는 동안에는 기쁨이 없다. 하느님과 따지겠다고 큰소리치며 하느님을 찾는 욥의 기개와 용기는 높이 살만하며, 불의한 운명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욥의 자세는 자유인의 귀감이다. 그러나 인생을 한탄하며 남을 원망하는 동안에는 대장부도 자유인도 될 수 없다.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이 갖는 역동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하면 안 되는 것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점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욥이 자신의 운명을 다 알아버리겠다는 자세가 못마땅하시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기를 바라신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자연의 주인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자연 생명을 섬기고 돌보는 자일 뿐이다.

5. 욥의 마지막 대답

욥기 42장에서 욥은 회개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작가인 박재순 목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편견과 욕심에 사로잡힌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사물이건 하느님이건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한쪽만 보거나 일그러뜨려서 본다. 언제나 보는 사람의 관점이 대상을 지배하고 왜곡한다. 그래서 바라봄의 횡포가 저질러진다. 바라봄의 횡포에서 벗어나려면 보는 자와 대상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유로운 깨달음의 경지일 것이다. 신학자 선순화는 우리의 오관인 보기, 듣기, 만지기, 냄새 맡기, 맛보기를 통하여 대상을 그것이 아닌 나의 일부로, 나로 직접 체험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탄원과 심판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하느님과 일체감을 이루기 힘들다. 그러나 하느님을 내 생명의 근원, 내 존재의 근원으로 만난다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 하나가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성서적인 초월은 역사의 현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욥은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참회한다. 자신은 유한하고 부족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티끌과 재가 날리는 현실의 세계로 들어온다. 하느님 앞에서 참회하는 인간은 지나온 삶의 잘못을 바로잡고, 새 삶을 시작한다. 참회는 새 역사를 짓는 시작이다.



1. 나는 하느님이 사람을 두 발로 걷게 하신 깊은 뜻을 일찍 깨달음으로 써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 하늘의 신령한 바람을 쐬라고, 하느님과 영적인 사귐을 나누라고,

   하느님은 인간을 두 발로 걷게 하셨다.

 

2. 부활이란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불어, 독일어 모두 '일어섬'을 뜻한다.

 

3. 욥은 주어진 삶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고통의 잔을 마지막까지 다 마셨다.  그런 점에서 욥은

    충실한 사람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리고 삶의 주권을 하느님께

    맡겼다는 점에서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4. 사람의 목숨은 숨이다. 지금 이 순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목숨이 달려 있다. 숨을 쉰다는

    것은 과거나 미래에 매이지 않고 관념이나 원리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사는

    것이다.

 

5. 숨은 몸과 영혼을 잇는다. 몸으로 쉬는 숨이 곧 영이다. 히브리어 루아흐, 그리스어 프뉴마,

    프쉬케 라틴어 스피리투스, 인도어 아트만은 모두 숨 또는 바람을 나타내는 말로 영을 뜻한다.

    숨은 생명의 바람, 영의 바람으로 몸을 채운다. 숨을 바로 쉬면 사나운 욕심도 줄고, 분노와

    미움도 식고, 한도 풀리고, 깊은 상처도 아물고, 밝고 따뜻한 생명, 기운이 솟는다.

 

6. 숨은 몸과 영혼을 이을 뿐 아니라, '나'와 나 밖의 세계를 잇고 통하게 한다. 생명의 숨을 쉰다는

    것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세계와 통하고 사귀고 싶은 열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과 하나 되고

    남고 통하려는 열망이 모든 생명체의 꿈이다. 성적 욕망도, 종교적인 갈망도, 철학과 예술의

    근원적인 바람도, 정치적, 사회적인 모든 노력도 남 안에서 나를 보고 내 안에서 남을 보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과 하나 되고 서로 통하려는 열망이 삶이 근원적인 동력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겠는가.

 

7. 숨은 우주의 생명 중심과 통한다. 맨 처음에 하느님이 사람을 지어 코에 하느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사람의 숨은 하느님의 숨이다. 사람의 숨은 하느님의 생명의 숨과 이어져

    있다. 날숨은 나를 비움이고 버림이고 죽임이다. 들숨은 하나님의 영과 생명을 받아들임이다.

    들이시고 내쉼으로써 내 몸과 영의 생명은 자란다. '나'의 '가운데'를 비우면 하느님의 생명

    바람이 불어온다. 죽음의 나락에서도 생명의 숨을 쉬는 사람은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죽음을 이길 수 있다.

 

8. 내 속에 생긴 생각 토할 곳 없으면  나 죽이는 독물 되고, 남에게서 나온 생각 들여마심 없으면

    나 숨막혀 죽을 것이다.   - 함석헌 -

 

9. 참회와 고백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 마음을 열고 마음을 주는 일. 영혼의 가장 깊은 속살을

    드러내는 일이므로 인간의 삶에 영적으로 깊은 차원을 열어준다. 참회하고 고백하는 인간만이

    하느님과 사귈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10. '상처박을 수 있는 창문'  , 도로테 죌레

  군인은 군비경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상처받을 수 있는 창문을

  닫혀야 한다고 말하네.

  내 살갗은 상처받을 수 있는

  창문.

  습기 없고 접촉 없으면

  나는 죽게 되네.

  상처받을 수 있는 창문이 막히면

  내 땅은 살 수 없네.

  생각하기 위해서

  빛이 필요하고

  숨쉬기 위해서

  공기가 필요하듯

  우리는 하늘을 향해

  열린 창문이 필요하네.

 

 

11. 욥은 들풀을 알고 느끼는 사람이다. 몸으로 삶의 나락을 겪어본 사람을 들풀처럼 겸허한

     자리에 서서 들풀과 같은 눈높이에서 삶을 볼 줄 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져 본

     사람. 들판으로 쫓겨난 사람은 들꽃의 삶을 알고 그 길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다.

 

12. 땅의 힘이 내 발로 올라와 머리를 통해 저 까만 하늘에 뻗는다

 

13.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놓고 하느님께 기도함.

     야곱이 자신의 운명을 놓고 하느님과 밤새 씨름함

     모세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놓고 하느님과 끊임없이 담판을 함.

     시편 저자들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언제까지 지켜보냐고 하느님께 탄식하며 항의함.

     예언자들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놓고 하느님 앞에 몸부림침.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하느님께 호소하고 기도하심.

     -> 욥의 신앙은 결코 굴복하거나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항의하고 따지는 부르짖는 신앙이다.

 

14. 평화(平和) = 밥(禾)이 + 입(口)에 고르게(平) 들어가는 것.

 

15. 라합과 레비아단(욥26:11-13)은 태초에 바다에 살던 신화적 괴물인데 혼돈의 세력, 제국주의를

     뜻한다. 바다는 자연의 혼돈을 나타내고 라합은 그 혼돈의 세력을 나타낸다. 구약성서에서

     라합, 레비아단, 용은 인간을 위협하는 근본적인 악의 세력 두 가지를 나타낸다.

 

16. 삶도 일도 되는 차원, 맡기는 차원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 결정과 마무리를 내가 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기고, 동료에게 맡기면 일이 편하고 쉬워질 것이다.

 

17. 고대의 다른 종교에서 신은 늘 왕과 깊은 관계를 지닌 존재인 데 반해 성서의 하느님은 종과

     틀별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성서의 종이란 말을 존귀하게 쓴다. 대제사상, 왕, 예언자는

     하느님의 종이다. 메시야 예수도 하느님의 고난받는 종이며, 남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성직자와 장관을 지금도 minister(종)라 부른다.



개갓냉이 1


개갓냉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