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아 안녕/나태주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나태주 시인
오늘도 풀꽃 사인을 했다. 몇 장을 했는지 모르게 많이 했다. 문학 강연장에서는 기본이고 공주풀꽃문학관에 머물 때 관광객들이 오면 관례처럼 풀꽃 사인을 청한다. 심지어 길거리나 시장통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독자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한다. 처음엔 쑥스러웠는데 이제는 당연한 듯 사인을 해준다.
대개 사인을 할 때는 자기 이름과 날짜 정도만 써준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데가 있다. 그건 아무래도 밋밋한 것 같아서 상대방의 이름과 날짜, 나의 이름을 적고 그 아래에 ‘풀꽃’ 시를 적어준다. 적어주더라도 전문을 다 적어준다. 물론 비뚤거리는 문인 특유의 악필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사인을 해주는 이쪽보다 사인을 받는 저쪽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어떤 경우에는 가슴이 떨린다고 말하기도 하고, 정말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도 있다. 종이에 적는 글자 수가 많다 보니 시간이 꽤 걸린다. 사인을 받으려고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인내심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조용히 사인을 한다.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 학생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길게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다. 나중에는 그것을 지켜보던 학교 선생님들도 놀라워하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학생들 뒤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 말하자면 아이들을 통해서 어른들이 배우는 공부다.
나 자신도 놀랍다. 그냥 종잇장 한 장에 쓴 사인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써야 할 자리에 어머니나 아버지, 언니나 동생 이름을 대신 써달라는 아이들도 있다. 내가 한 사인이 무슨 무당의 부적이라도 된단 말인가! 눈물겨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글씨로 ‘효자 아들을 두어서 기쁘시겠습니다’ ‘효녀 딸을 두셔서 좋으시겠습니다’라고 써주기도 한다.
가져다가 조금만 보고 버려도 좋고 아무렇게나 처박아 두어도 좋겠다. 문제는 한순간만이라도 이런 사인을 원하고 이런 사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더욱 기르고 간직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중히 아름답게 보는 눈이 될 것이고, 그렇게 살다 보면 필경 그의 인생조차도 아름답게 될 것이고 성실한 인생,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사인을 하다가 미처 못 해준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뒤, 시간이 날 때 차근차근 사인을 해서 학교로 보내주곤 한다. 그런 학교, 그런 아이가 많다 보니 때로는 중노동이다 싶고, 길게는 일주일을 두고 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귀찮다는 생각을 떨치고 열심히 사인해서 학교로 보내준다.
요는 약속이다. 더구나 어린 사람들과의 약속이다. 시를 쓴다는 사람이 아이들에게 사인을 해준다고 말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럴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라고. 그래서 그 아이들은 약속을 적당히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까지도 부지불식간에 배우게 될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면 아이들은 저절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는 사인 한 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인을 할 때는 사인을 해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 중요하다. 그냥 아무렇게나 형식적으로 해주는 사인이 아니라 정성껏 해주는 사인이라는 걸 저쪽이 알도록 해야 한다. 그야말로 그 관계는 일 대 다수의 관계가 아니라 일대일의 관계다. 또, 그것은 복사본이 아니고 유일본이다. 하기는 우리네 인생이 유일본이고 우리들 자신이 유일본이다. 이런 데서도 우리는 상호 간 자존감을 깨우칠 수 있다.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내가 쓴 ‘꽃들아 안녕’이란 제목의 시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꽃들에게 알은체 인사를 할 때도 한꺼번에 쭉 훑어보면서 거만한 태도로 안녕! 그렇게 인사해서는 꽃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사를 할 테면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길을 가다가 예쁘게 피어 있는 꽃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일단 발길을 멈춘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꽃과 눈을 맞춘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쭈그리고 앉아서 옆에서 볼 때의 꽃은 아주 다른 꽃이 된다. 위에서 보는 꽃은 수직의 꽃, 군림이나 지배하는 개념의 꽃이지만, 옆에서 보는 꽃은 수평의 꽃이고, 평등이나 호혜 개념의 꽃이다.
대번에 꽃의 표정이 달라진다. 작은 꽃송이가 커 보이고 그저 그런 꽃이 웃음 가득 머금은 예쁜 꽃이 된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서 그 꽃의 얼굴을 간질이는 귀여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하나의 인격이고 대등한 생명체다. 그것은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변의 만물이 다 그러할 터. 산길에서 만나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그러할 것이고 하늘을 흐르는 흰 구름도 그러할 것이고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조차 그러할 것이다.
내가 독자들을 만나 사인해주는 행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의 자세를 낮출 만큼 낮추고 상대방을 귀히 받드는 마음으로 사인을 해줄 때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생각을 가지게 돼 있다. 때로는 감동을 받기도 할 것이고 자기 자신이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누군가한테서 대접받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것을 나는 행복감이라고 부르고 싶다.[출처]문화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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