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0분 강의]제106회(진상 신앙인) ㅣ 홍성남신부님의 톡쏘는 영성심리
안녕하세요. 카톨릭 영성심리소 소장 홍성남 신부입니다.
오늘 은 제가 좀 쓴 소리를 할까 합니다. 저는 제가 상담일을 시작하면서 참 많은 곳을 강의를 다녔습니다.
본당 신부 생활도 나름대로 꽤 했구요. 여러가지 경험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어느 성당이나 참 골치아픈 신자들이 있구나! 하는것이였어요. 소위 성당마다 터줏대감이 계는데, 이 분들 중에 정말 말없이 봉사하시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봉사를 하는 것은 같은데 주위 사람을 아주 불편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를 들면 다른 신자분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왜 성당에서 기도하지 않고 떠드는거야? 기도는 안하고 놀러만 다니는거야? 신자라면 늘 손에 묵주는 들고 다녀야지? 등등 이런 잔소리를 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밑바닥에 깔려있는 생각은 나처럼 살아라! 오만방자한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이분들에 대해서 좀 분석을 해드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이 잔소리가 심해서 심약한 신자분들이 이분들 한테 눌려지내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진상 신앙인들의 심리가 어떤 것인가? 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컴플렉스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컴플렉스는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설명을 했는데, 억압된 욕구를 무의식안에 축적한 관념들의 복합체라고 아주 어렵게 설명을 합니다. 컴플렉스 중에서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 가장 괴롭히는 것이 바로 열등 콤플렉스 입니다.
바로 열등감이라고 그러죠. 열등감이 오래 지속되고 정도가 지나치면 피해의식에 도달하고 피해 망상 수준까지 이를 수 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열등감은 감정상태이고, 피해의식은 사고형태인데,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외적으로 대개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많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누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권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분야의 마스터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하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정말 권위있는 사람들은 권위를 안 부립니다. 내가 권위있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두 찾아오죠.
아는게 쥐뿔도 없으면서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권위를 내세우고 싶어 합니다.
내가 누군데! 내가 뭐하는 사람인데!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그냥 빈 껍질인데, 안에 열등감이 가득 찬 사람입니다.
이렇게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이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내면의 위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미천하고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권위주의로 나타나는 것이죠. 나한테 감히 덤비지 못하게 소리를 지르고 잔소리를 하고, 나처럼 살아라! 하면서 오만방자한 짓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편집증적인 피해의식이 있어서 늘 주위 사람들을 의심을 한다고 합니다.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자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의사이며 심리학자. 인간은 누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보상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생활양식이 형성되어진다라고 했으며, 열등감을 바로 잡기 위한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했음)
아들러는 '권력의 의지'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획득해서 자신들의 뿌리깊은 열등감을 극복하려 든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성공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열등감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란 것이죠. 물론 그렇게 하는 것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공을 해서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은 필요하겠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열등감을 해소하는 것이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갈 때, 그 때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죠. 거만한 태도를 보여서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하는것인데,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피해의식, 찌질한 피해의식을 은폐하고 만회해보려는 행동이라는것이죠. 이것은 일종의 자기 기만입니다. 타인을 속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동이지요.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기 위한 자구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요.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욕구가 아닌 야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망과 야심은 다르죠.
야망이란 것은 내가 좀 더 큰 인물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야망이죠.
야심은, 이게 좀 애매하죠. 다른 사람을 내리 눌러서 얻고 싶은, 강제적으로 존경을 얻고 싶은, 강제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들이죠. 이런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야심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의 기운이 어떤 것이든 결과적으로 생긴 지나친 야심은 신앙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종교적 도덕적 형태를 취한다'
그랬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영역이 종교적인 영역 안에 들어오면 도덕적인 야심을 부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자아가 타인을 이기려는 싸움의 무대로써 도덕적인 영역을 선택하죠.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욕구를 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보이는 도덕적인 약간의 하자들에 대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잔소리라는 것은 상대방을 나보다 하잖고 못하다고 여길 때 하게되는 것이죠. 실제로 내가 저 사람하고 동격이라고 할 때에는 대화를 하죠. 내 의견을 말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죠. 그런데,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적으로 잔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이 찌질한 인간이라고 하는 열등의식 때문에 잔소리를 한다라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계안에 들어와서 도덕이란 것으로 위장이 된채로 밖으로 나갈 때에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약간 반감을 가진다는 것이죠. 말은 맞는데 참 피곤하다라고 느끼는 감정을 가진다는거지요.
ego supremacy(에고 슈프리메시), 자아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하잖은 내용을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강조하는 책략을 씀으로써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높이 끌어 올리려고 한다라고 그랬습니다. 이 책략을 가장 많이 쓴게 누구냐? 바르사이들이었습니다.
ego supremacy(에고 슈프리메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쓰는 도덕적인 책략들을 듣다보면 "아~ 참~ 쪼잔하다." 그런 느낌들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요만한 것들에게 까지 일일이 다 시비를 거는 겁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인데도 일일이 다 비난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안에 도덕적으로 니들보다 월등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죠. 사람들은 잔소리를 듣기 싫으니까 "아~ 그냥~ 당신 뜻대로 하라."고 말하는것이죠.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아~ 쪼잔한 영감!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지요."
특히 제일 많이 욕 먹는 게 신부들이죠. 신자들 한테 잔소리가 많은 신부님들! 자기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잘 아냐구요? 제가 그랬거든요!
심리학자 아들러는 야심이 종교적인 문제에 얼마나 개입하기 쉬운지, 허영이 사람을 미덕과 악덕, 순수성과 부패, 선과 악의 심판자로 만드는지에 대해서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자아우월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심판자의 역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거야!' 라며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리에 있다라고 하는 자기과대망상에 사로잡힌거지요. 이게 진짜 문제라는거지요.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의 열등감은 지나친 야심으로 변질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그의 자아 추구는 도덕 영역에 있음으로 타인을 도덕적으로 경시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계속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눈으로 흘겨 본다거나, 사람을 무시한다거나, 인사를 받지 않는다거나 등 무의식적인 자기 표현은 험담을 하는 것 보다 더 안 좋다라고 아들러는 이야기 합니다. 무의식적 단죄는 의식적인 것보다 더 건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열등감, 도덕적인 야심을 가진 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씀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예외없이 삶이란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수업이 하루 24시간인 학교에 살아있는 한 수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수업은 언제까지나 반복될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될 과목은 사랑 관계 상실 두려움 인내 받아들임 용서 행복들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 수업은 궁극적으로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가 이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나비가 누에를 벗고 날아 오르는 것 처럼
우리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허락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