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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29일 주일[(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월 29일 주일[(녹)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로 홍보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을 돕는 데에 쓰인다.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대영광송>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라.>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3; 3,12-13
3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3,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6(145),6ㄷ-7.8-9ㄱ.9ㄴㄷ-10ㄱㄴ(◎ 마태 5,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26-31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5,12
◎ 알렐루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알렐루야.

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처럼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며, 세상에서 약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을 먼저 보살피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로우신 주님, 공직자들에게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주시어, 그들이 사명을 올바로 깨닫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며, 모든 일에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게 하소서.

3. 해외 원조 주일을 맞아,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온유하신 주님, 전쟁과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어, 생명을 지켜 주시고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하시며, 저희는 가진 것을 나누고 인류의 공동선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사랑을 심어 주시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복음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1 : 파스카 신비와 하느님 백성>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강론

 

엠이 부부모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하였습니다. 함께 했을 때의 기억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식구들과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손자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읽었습니다. 4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쉽게 찾지 못하고,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복권을 사지만 당첨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습니다. 3잎 클로버는 행복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같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행운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모와 체격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거의 문맹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이곳 뉴욕으로 왔는데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사제들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무덤 성당과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조배하러 가니 수사님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행복입니다. 매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교우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할 때가 행복합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주 새로운 지면을 만드는 것은 때로 전쟁과 같습니다. 직원들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제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2. 2023년 01월 29일 일요일

[연중 제4주일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신약 성경에서 행복하다’ 또는 행복하여라라는 표현과 함께 전해지는 말씀은 모두 행복 선언에 속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신 마태오 복음의 내용은 운문 형태로 전해지며 참 행복’ 선언으로 불립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아 대부분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대 사회에서 운문 형태는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참 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였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복음서에서 참행복으로 불리는 본문은 두 가지입니다.

진복팔단으로도 불리는 오늘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에서도 행복 선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루카 6,20-23 참조).

두 행복 선언이 강조하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슬퍼하는 사람들굶주리고 (의로움에목마른 사람들과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주제는 공통적으로 행복 선언의 끝에 자리하면서 시대 배경을 잘 보여 줍니다.

행복 선언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미래에 올 보상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지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행복 선언은 위로의 말씀이면서 신앙인들을 향한 윤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만일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현재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도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스코 신부님 강론

 

믿음의 은총과 훈련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굳건한 믿음으로 간구하오니

당신의 빛으로서 채워주시어

우리가 맞이하는 그모든날을

흠없는 참삶으로 이끄옵소서.”

 

어제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찬미가 한연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하나를 청한다면 믿음뿐이겠습니다. 믿음의 은총입니다. 은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 역시 다른 수행처럼 부단한 훈련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개인 신앙은 약하고 부족합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 믿음에 뿌리 내릴 때 건강하고 안전한 신앙입니다.

 

저희 요셉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이 찾아오는 모든 이를 언제나 환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참회합니다” 다음 “믿습니다”를 넣어 다음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전, 어둠이 짙어질 때 노수사님들 모습이 참 초라하고 한생이 덧없어 보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대로 믿음이 걸어다니는 모습들처럼 보였습니다. 한생을 믿음으로 살아온 분들입니다. 노년에 남는 것은 하느님 믿음과 밥뿐인데 믿음은 없고 밥의 욕망만 남아있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을 잊지 못합니다. 

 

믿음없는 탐욕만 남은 삶, 그대로 노추, 노욕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삶에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그동안 자주 인용했던 두 말마디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에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이 셋의 우선 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된다. 하느님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의 평화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영육의 건강이요 돈에 대한 탐욕도 절제할 수 있다.”

 

어찌 노년뿐이겠습니까? 존엄한 인간 품위의 기반이 되는 믿음입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 믿음만이 돈의 유혹을 넘어 건실한 인간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 모습이 그대로 믿음 약한 우리들 모습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배가 돌풍으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좋은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은 울부짖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대로 박해와 온갖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인생 항해 여정중 얼마나 많은 공동체나 개인들이 조난과 파선의 위협을 겪고 있는지요? 당시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살아계신 주님을 잊은 탓입니다. 그대로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허약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의 말씀의 위력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자 예수님은 재차 이들의 믿음 약함을 책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대로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다음 물음이 오늘 화두처럼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이름 ‘나다’라는 이름의 임마누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나다(I AM)”, 영문으로 하면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인지요!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정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이 참 좋은 믿음의 본보기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어 믿음으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종합한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입니다. 궁극으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늘 향할수록 더욱 깊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나무를 닮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이요, 반석같은 믿음 위에 건축되는 인생집입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서방의 4대교부,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교황 대 그레고리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성인학자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어보면 ‘불꽃의 아우구스티노’와 ‘얼음의 토마스’가 느껴질 것이다.”

 

참 좋은 대조와 더불어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 학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박사라 칭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 나이로 선종하기 까지 어떻게 그 많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성 토마스의 인품에 대한 설명과 그의 깨달음 및 어록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삶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다.”

 

그가 신학대전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한 사유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끝마친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다음같이 대답했다 합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성인의 깊은 겸손도 이런 하느님 체험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성 토마스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합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답변인지요! 이어지는 어록도 인상적입니다.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이다.”

“인간 안의 이성은 세상 안의 하느님과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에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고로 가득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으로 믿음의 성인이요 대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루카12,42). 아멘

 


[1/29(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진복팔단으로도 불리는 오늘 마태오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에서도 행복 선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루카 6,20-23 참조).

두 행복 선언이 강조하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허규 신부)

 

3.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이영근 신부)

 

4. 성 토마스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합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이수철 신부)

 

[[1/29(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제 36일 기도]

 

하느님!

언제나 늘상 어디서나 행복하게 하소서.

저와 동행하시는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29일(일) 7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