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월 28일 토요일[(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월 28일 토요일[(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1245년부터 파리에서 공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3년 뒤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토마스를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로 세워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삶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루카 1,69-70.71-72.73-75(◎ 68 참조)
◎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우리를 위하여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세워 주셨네.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하셨네. ◎
○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그분은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네. ◎
○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우리가 원수들의 손에서 풀려나, 아무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게 하셨네.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7,7-10.15-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하느님,
복된 토마스를 기리며 드리는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저희도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루카 12,42 참조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의 힘을 북돋아 주시니
복된 토마스를 기리는 저희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지순례를 마치고 뉴욕에서 아침으로 곰탕을 먹었습니다. 며칠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인지 곰탕의 구수한 육수와 김치 그리고 깍두기가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전학적인 분류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DNA는 인류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도 DNA 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분류도 타당한 방법이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분류방법입니다. 교포 2세들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민족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살지만 입맛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4년간 살면서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국음식을 한국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먹방이 인기 있는 것도 미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제이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서는 예수님 탄생을 표시하는 곳에서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에서도 사제이기 때문에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교구에서 발급해준 사제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이 함께 입는 사제복입니다. 사제복에는 로만칼라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고 하얀 로만칼라는 제가 사제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 심사를 받을 때도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 심사원이 신부님!’이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복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습니다. 32년 사제로 지내보니 사제복이 제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미각이 쉽게 변하지 않듯이, 사제는 사제복을 입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학과 과학에는 공리가 있습니다. 공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증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리라는 터전 위에 수학과 과학이라는 탑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증명과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배움과 탐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념과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행동의 여정입니다. 사제라는 직분이 믿음에 도움을 주겠지만 실천과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에는 믿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 부족, 민족은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이라는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2. 1월 28일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기도생활이 늘 기쁘고 열정으로 채워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시간의 성체조배, 한 꾸미의 묵주기도가 때로는 분심과 무미건조로 채워져서 그 고통을 호소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미사 때에 다른 생각으로 또 형식적인 습관으로 이이어지다 보면 미사 후에 ‘내가 지금 뭐하는 것인지?’하며 반문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수도자들, 그것도 우리 교회의 보고라고 하는 봉쇄수도자의 호소 중에 하나가 ‘영성의 사막’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성소의 삶이 무미건조한 것이기에 갈등과 때로는 실망으로 절어있지요.

그 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느님의 부재’가 다가 오는 것이기에 때로는 수도생활의 의미를 물어 볼 때가 있고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소를 떠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비단 수도자,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교우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하다가도 문득 이런 질문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느님은 계신 것인가?’ ‘이천년 전 이스라엘 한 귀탱이에 계시던 예수님과 연결은 되고 있는 것인가?’ ‘그분이 세우셨다는 가톨릭교회가 참다운 종교인가?’라는 별별 회의의 질문으로 자문하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 그것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시험을 겪지요.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는 마당에 하느님께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의심에 그들은 불평하고 또 모세에게 대들기까지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를 받지만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존재이지요. 내가 하느님을 믿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때로는 거기에 회의를 갖게 되고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노고 없는 결실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 고통과 회의를 거치지 않는 신앙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비자들의 교리를 하면서 또 세례성사 때에, 지금은 신앙의 기쁨을 누리겠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기에 ‘시련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굳데 신앙을 지키라’는 당부를 하게 됩니다.

신앙은 무지개 빛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서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히브 11,17)

히브리 저자의 말대로 아브라함에게는 시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냐?’ 아니면 ‘아들에 대한 사랑이냐?’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아들을 제단에 바치려 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감동하시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이리 저리 선교여행을 합니다.

군중을 가르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주님께서 배에 오르십니다.

제자들은 그저 주님께서 좋기만 합니다. 그분은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니 어떻게 보면 우쭐할 정도로 스승님께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의 배는 거센 돌풍을 만나 애를 먹습니다. 그런데도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참다못해 주무시는 스승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주님께서는 일어나시어 바다를 향해 호통을 치시고 조용해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바다는 아주 고요해 집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한 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그런데 그들은 아직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풋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우리의 오류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것은 신앙을 머리로 또 이론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것으로 뒤범벅이 되어 시끄러울 수 있는데, 이것이 어쩌면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배추를 가지고 김치를 담글 때, 양념이 골고루 버물고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김치의 고유한 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시련과 고통의 단계를 거칠 때 비로소 ‘신앙의 맛’을 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앙은 생각처럼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려 주시듯 우리도 자신과 이웃의 신앙을 기다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다려주고 인내하면 우리가 받은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하느님 나라를 가까이 시작할 수 있게 되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님 복음 묵상

 

2301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곧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께 네 길을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이 몸소 해주시리라.

 빛처럼 네 정의를 빛내시고, 

 대낮처럼 네 공정을 밝히시리라.“(시편37,5-6)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신비가가 됩시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마땅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비상한, 특별한 신비가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신비가입니다. 이래야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어떻게? 시종일관, 한결같이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을 훈련하여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언젠가 산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살지 못하면 내일도, 또 죽어서도 못삽니다.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사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입니다. 저절로 “아, 놀랍다, 새롭다, 좋다” 탄성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시인이, 사랑의 시인이, 사랑의 신비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신비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일상의 하찮은 사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의 비유로는 겨자씨의 비유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숨겨진 것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란하거나 시끄러움 없이, 말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겸손히 바라보고 지켜보고 경청하는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일상의 자세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리석게도 유혹에 빠져 긁어 부스럼 만든다든가 녹을 지우려 그릇을 깬다든가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니 말그대로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나서지 말고 필요하다 생각될 때 조용히 뒤따라가며 가꾸고 돌보며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사랑의 침묵, 사랑의 경청입니다. 침묵과 경청에 이어 존경과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현재의 교황님께서 고 베네딕도 전임 교황님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감동적인 인터뷰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이런 존경과 사랑의 자세가 하느님 나라의 삶에 필수입니다. 

 

-교황은 베네딕도 16세를 “신사(a gentleman)”로 표현하셨으며, 그분의 죽음과 더불어 “나는 아버지를 잃었다(I lost a father)”고 말씀하셨다. 내게 있어 그분은 ‘하나의 보장’(a security)’이었다. 내가 의문에 직면했을 때, 나는 지체없이 차를 불러 그분 계신 수도원에 가서 여쭤보곤 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인지요! 전임 교황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두분간의 영적우정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런 타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존경과 사랑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의식적, 필수적 영성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황님에게 이런 전임 교황님과의 아름다웠던 영적우정의 추억은 하느님 나라를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두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 인내와 믿음입니다.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기다림의 인내와 믿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믿음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봄꽃들 폈다하여 먹음직스러운 배열매가 아니라 가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한 인내가 아니라 참으로 이런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신망애 없이는 한없는 기다림의 인내는 불가능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바로 인내와 믿음을 강조하는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지는 11장에서 믿음에 대해 길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며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인내와 믿음의 경우 제가 드리고 싶은 답은 단 하나, “하루하루살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정주의 삶을 살다보니 요셉수도원에 정주한지 만35년입니다. 밖에서 볼 때 수도원은 평화로운 천국같지만 안에서 보면 하루하루가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며, 마침내 선종의 선물같은 죽음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하루하루 사시기에 다음같은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은총의 시간이자 새로운 기회다. 그러니 매일 기쁘게 살아야 한다. 기쁨을 결缺하고 있을 때, 복음은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기쁜소식, 복음은 그의 본성상 ‘기쁨의 선포’(a proclamation of joy)’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의 궁극의 가르침입니다. 침묵과 경청, 존경과 사랑, 인내와 믿음의 자세로 시종일관,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며 주님께 협조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나한테 달린 듯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28일(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기다려주고 인내하면 우리가 받은 신앙은 더욱 성숙해지고 하느님 나라를 가까이 시작할 수 있게 되겠습니다.

(정인준 신부)

 

3. 놀라운 것은 저절로 자라는 씨에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숨겨진 것이,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란하거나 시끄러움 없이, 말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일에 잘 협력해 드리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겸손히 바라보고 지켜보고 경청하는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28일(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제 35일 기도]

 

하느님!

말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일하시는 하느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1월28일(토) 3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