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월 30일 월요일[(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32-40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
○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시고, 당신 거처 안에 숨기시어, 사나운 구설에서 구하시나이다. ◎
○ 포위된 성읍에서 당신 자애로 내게 기적을 베푸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 겁에 질린 나머지 제가 말씀드렸나이다. “저는 당신 눈앞에서 쫓겨났나이다.” 그러나 당신께 도움 청할 때, 애원하는 제 소리 들어 주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은 진실한 이들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신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1월 30일 월요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공생활의 시작에 예수님의 능력을 구마로 소개한 바 있는 마르코 복음은 다시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21-28 참조). 두 이야기 모두 악령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과
오늘 복음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과 함께 복음 선포라는, 예수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의 외침에도 그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이 사건은 주민들을 통하여 그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악령이 들렸다가 제정신을 찾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함께 있기를 청하는 것은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이 ‘함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치유 받은 이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사명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여기서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의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납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2시간 정도의 거리는 쉬지 않고 운전하지만 5시간을 넘으면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운전하면 차에도 무리가 오고, 운전하는 사람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2023년 1월의 끝자락입니다. 이스라엘과 과달루페를 방문하는 성지순례도 2번 있었고, 한국에서 온 신부님과 모임도 있었고, 앨파소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방문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정이었습니다. 일정의 중간에 몸살이 왔습니다. 며칠 쉬면서 지내니 몸살은 떠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무 무리한 일정을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제게 몸살을 주신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시면 그 집을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라.’는 성경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의욕과 과욕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모든 악보는 쉼표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한 달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께 의탁하면서 마무리 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그 만남에서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시 마리아여!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룰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230129. 연중 제 4주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참행복한 성인들
“찾으라, 회개하라, 행복하라”
-선택, 훈련, 습관-
새벽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 첫시집 ‘하늘과 산’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니까 1997년 손수 제본하여 만든 것이니 26년전 작품입니다. 모두 제가 지금도 아끼는 시이고 그중 ‘하늘과 산’은 자주 인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35년 동안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하늘입니다. 바로 하늘과 불암산의 관계를 주님과 나의 관계로 빗댄 시입니다. 정말 날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3년부터 매해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해 이날 특별헌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돕는데 쓰고 있습니다. 이 또한 더불어 삶의 사랑 실천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9명의 소규모 젊은 남녀들의 피정팀에게 ‘명상기도’방법을 가르치고 실습도 했습니다. 모두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보니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등 다양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강의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명상기도 방법을 택하여 청했던 것 같습니다. 좌우간 이분들에게 강조한 것도 영성생활에서 선택과 훈련,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셨으니 아름다운 수도원에 피정을 온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 또한 은총입니다. 명상기도 참 좋은 선택입니다. 선택에 이어 한결같은 훈련입니다. 도대체 수행생활에서 훈련아닌 것이 없습니다. 명상기도를 부단한 훈련하여 습관화하십시오. 성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부정적 비관적 수동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인생관으로 바뀝니다.”
요지의 내용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행복입니다. 참행복 역시 은총에 이어 우리의 선택과 훈련, 습관에 달렸습니다. 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찾으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과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 영적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자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의로움을, 겸손함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의롭고 겸손합니다.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요,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 고백에서처럼 하루 이틀이 아닌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사랑의 맑은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일일시호일, 늘 좋은 날에 늘 새로운 날입니다. 이래야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 역시 우선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회개 또한 참 좋은 날마다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회개입니다. 하느님 거울에 날 들여다 보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참나의 발견이요 제자리에서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회개에 따른 참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고백은 그대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를 통한 이런 깨달음이 겸손이요 이런 겸손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다음의 고백은 얼마나 겸손하며 삶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요!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역설의 진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신의 한 수는 이토록 오묘합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이들이 교회를, 수도원을, 세상을 지킵니다. 참으로 회개로 겸손한 이들만이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셋째, 행복하십시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의 비결을 보여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끝없는 노력의 훈련을 요하는 결코 완성이 없는 미래로 활짝 열려 있는 수행의 참행복입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참행복의 길뿐입니다.
십계명은 너무 소극적입니다. 금령만 지키다 보며 거기서 끝나지 이웃과의 적극적 사랑의 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한계입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이런 경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모세를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는 좋은 신자가 될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신자. 자비로운 신자, 온전한 신자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결코 참행복도 없고 성인도 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열려 있는 삶이 아니라 자기 안에 닫혀진 이기적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을 전제로 하고 적극적 자기개방의 나눔과 사랑이 절대적이요, 바로 오늘 산상설교중 진복팔단 참행복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삶자체가 참행복이니 바로 하느님이 직접적 배경이, 보상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큰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대영성가들이 공감하며 극찬한 참행복의 내용들입니다.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로 열려 있는, 완성이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참행복입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처럼 느껴지는 참행복의 수행들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한결같은 열정으로 참행복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분투의 노력에 불을 붙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자신의 성덕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으로 하고 8개 항목을 각자 10점 만점으로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미완성의 참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참행복의 절정에 하느님 곁에 계신 예수님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유일한 참행복의 길이겠습니다.
참행복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하는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부단히 주님을 찾는, 부단히 회개하는, 부단히 참행복을 추구하는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1/30(월)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이 ‘함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치유 받은 이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합니다.(허규 신부)
2.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조재형 신부)
3.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이영근 신부)
4.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수철 신부)
[1/30(월)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 37일 기도]
하느님!
매사 하느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늘상 행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월30일(월) 6시40분...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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