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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6일 화요일[(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6일 화요일[(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무엘이 형들 한가운데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주님의 영이 그에게 들이닥쳤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9(88),20.21-22.27-28(◎ 21ㄱ)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냈노라.
○ 예전에 당신이 나타나 말씀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선언하셨나이다. “내가 영웅에게 왕관을 씌웠노라. 백성 가운데 뽑힌 이를 들어 높였노라.” ◎
○ 나는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노라. 내 손이 그를 붙잡아 주고, 내 팔도 그를 굳세게 하리라. ◎
○ 그는 나를 부르리라. “당신은 저의 아버지, 저의 하느님, 제 구원의 바위.” 나도 그를 맏아들로, 세상의 임금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리라. ◎

복음 환호송

에페 1,17-18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2주간 화요일

 

천동설 지동설이 있습니다. 인류는 550년 전까지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출(Sunrise)와 일몰(Sunset)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입니다. 이는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천동설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별의 연주 시차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계절 변화인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발사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지구 중심이라는 사고의 폭을 우주로 향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보다, 1500년 전에 이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습니다.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60년 전에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4년 나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코 2,23-28

 

부부임을 자주 잊을 때 더 부부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발걸음 숫자가

정해져 있고 엘리베이터 층수도 누를 수 없으며 에어컨이 꺼져도 다시 켤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집중할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법에 집중할수록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혼에 집중할수록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경계에 집중할수록 차는 경계선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고양이가 무서워 어항 유리가 튼튼한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다른 물고기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법은 이 어항과 같습니다.

그냥 그 안에 머물면 되지 그것에 신경 쓰면 정작 법을 주신 분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줄거리입니다. 창욱은 40대입니다.

그는 번역가와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출판사 사장이고 남편은 아내의 글솜씨가

맘에 안 들고 남편은 아내가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둘은 얼마간의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자가 아내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했는지

먼저 이혼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도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소화기 문제로 먹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창욱에게 매일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창욱은 라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창욱은 의리 때문인지 당분간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워가며 하기로 합니다.

창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요리해보지 않았지만, 오직 아내의 소중한 한 끼를 위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쓰며, 서투르지만 조금씩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내는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괜찮게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부임을 잊고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라면 여자가 음식을 하고 남자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삶은 이 반대였습니다. 남편이 가정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일에만 열중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었습니다. 아내도 자신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는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차의 양쪽 차선에 집중하면 차가 뒤뚱거리다

결국엔 차선을 넘습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차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선을 넘는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더는 부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만을.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떨까요?

사람은 결혼이란 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5.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29-31)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며,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1-22)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새로운 단식입니다. 그래서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5.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분별의 잣대는 사랑의 예수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시편31,25)

 

밤마다 잠깨면 주님을 확인하듯 맨먼저 눈들어 확인하는 밤하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북두칠성과 북극성입니다. 어제 면담성사중 한 자매와 나눴던 시가 생각납니다. 법정(法頂)스님이 극찬했던 시요, 어느 사제는 수페이지에 걸쳐 쓸 내용을 시에 담았다고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저 역시 참 좋아하는 시입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저에겐 늘 저와 함께 계셔서 밤마다 매일강론을 쓰게 하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분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움과 갈망의 대상인,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단식논쟁을 말끔히 정리해 주시는 예수님은 삶에서 무엇이 우선적인지 새롭게 상기시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의 분별의 잣대는 사람이나 사랑이 아닌, 단식 자체에 있음을 봅니다. 절대적 가치는 사랑뿐이요, 분별의 잣대는 사랑인데 이들은 단식을 그 잣대로 들이댑니다.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으로 상황을 말끔히 정리해주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단식할 것이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가 있다는 것이요, 지금은 주님과 함께 기뻐해야할 축제의 때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지 단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구태의연한 사고를 참으로 유연하게 할 것을 바라십니다. 한마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기 위해 늘 새 부대의 마음이, 사고가 전제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일일우일신(日新又日新), 끊임없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요, 사랑이 분별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 일상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절대적 법은 사랑뿐이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분별의 잣대로 삼아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생각하면 답은 곧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평상시 예수님 공부가, 사랑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평생공부가 예수님 공부요 하느님 공부요 사랑공부입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로 고백할 수 있는 주 예수님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침 그 자매와 나눈 “사랑”이란 오래전 제 자작시도 나눕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27년 시이지만 여전히 애송하는 사랑이란 시입니다.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사랑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이 아니라 늘 제자리를, 거리를 견뎌내는, 지켜내는, 버텨내는 고독한, 그러나 감미로운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 바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백하는 주님이십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해선 안됩니다. 말그대로 죽어야 인생 졸업이요 죽어야 인생 제대입니다. 공부는,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깨어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전사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느님 중심으로 한결같은 삶을 살았어야 하는데 오늘 제1독에서 사울은 이점에 실패했습니다. 성소가 선물이자 평생 과제임을 잊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한 사울에 대한 하느님의 질책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였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늘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경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순종의 자세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늘 최선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늘 예수님을 삶의 잣대로, 분별의 잣대로 삼고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며칠전 금요강론시 나눈 대목이 생각납니다.

 

“규칙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야할 법이다. 성서에 의하면 법은 하느님의 선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더불어 살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우리를 수고스런 우회로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표지판이다. 그것은 힘든 여정중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철로와 같다.”

 

살아 있는 하느님의 법인 예수님을 늘 삶의 잣대, 분별의 잣대로 삼아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를 깨어 당신께 귀기울이게 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백하는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부대의 마음에 새 포도주의 영적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고해인생중에도 빛나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으로 축제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1/16(화)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조재형 신부)

 

2.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살아 있는 하느님의 법인 예수님을 늘 삶의 잣대, 분별의 잣대로 삼아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늘 우리를 깨어 당신께 귀기울이게 하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고백하는 주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 부대의 마음에 새 포도주의 영적 현실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고해인생중에도 빛나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으로 축제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이수철 신부)

 

1/16(화)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388(제18)일 기도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뱐화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늘상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 2024년 1월16일(화) 9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