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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7일 수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7일 수요일[(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356년 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입당송

시편 92(91),13-14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눌렀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32-33.37.40-51
그 무렵 32 다윗은 사울에게,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말렸다.
“너는 저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마주 나가 싸우지 못한단다.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였지만, 너는 아직도 소년이 아니냐?”
37 다윗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제야 사울은 다윗에게 허락하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40 그러고 나서 다윗은 자기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메고 있던 양치기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그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다가갔다.
41 필리스티아 사람도 방패병을 앞세우고 나서서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42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은 다윗을 보더니,
그가 볼이 불그레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업신여겼다.
43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에게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하고는,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44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시 다윗에게 말하였다.
“이리 와라. 내가 너의 몸을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45 그러자 다윗이 필리스티아 사람에게 이렇게 맞대꾸하였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46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나야말로 너를 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주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47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48 필리스티아 사람이 다윗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도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향하여 전열 쪽으로 날쌔게 달려갔다.
49 그러면서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50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누르고 그를 죽였다.
다윗은 손에 칼도 들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51 다윗은 달려가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밟고 선 채,
그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그를 죽이고 목을 베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저희 용사가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4(143),1.2.9-10(◎ 1ㄱ)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 그분은 나의 힘, 나의 산성,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 하느님, 당신께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악독한 칼에서 구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23 참조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6,10-13.18)와 복음(마태 19,16-2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를 기리며 주님의 제대에 드리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가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오직 주님만을 찾아 풍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19,2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복된 안토니오가 어둠의 세력을 누르고 승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구원의 성사로 힘을 얻어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안토니오 아빠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처구니는 궁궐 추녀마루 끝자락에 있는 흙으로 만든 조각물을 일컫습니다. 자연스럽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는 상황을 뜻합니다. 음식에 간을 맞추는데 소금 대신에 설탕을 넣으면 맛이 이상합니다. 이럴 때를 어처구니없다고 합니다. 강론 준비를 열심히 해서 저장해야 하는데 그만 저장안함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몇 시간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를 어처구니없다고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는 그래도 봐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카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함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세상을 정화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세리, 창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 신분, 이념, 계층, 성별, 민족의 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우리는 물질, 자본, 성장, 경제, 과학, 풍요, 발전이라는 패러다임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끝 모를 욕망의 탑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속이고, 폭력도 행사하고, 전쟁까지도 불사합니다. 스스로 지구별을 떠나기로 결정한 호주의 원주민들은 이런 사람들을 돌연변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째서 자연과 하나 되려 하지 않고, 자연을 정복하려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먹을 수 없는 금 덩어리를 얻기 위해서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고, 동료인 이웃들을 도구로 사용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분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법과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법과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마르 3,1-6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언젠가 사고의 여파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뵌 적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의외로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시더군요.

같이 식사를 하는데, 아무 불편 없이 젓가락질을 하는 저, 그래서 깻잎이든, 김이든, 콩자반이든

무엇이든 척척 집어먹는 저에 비해서 그분의 식사는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내적, 심리적 위축이 큰 것이더군요.

저는 상대방의 그런 상황도 모르고 반가워서 악수를 청했는데, 한참을 머뭇거리시며

굉장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사람 만날 때마다 얼마나 망설여지고 또 난감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도 손이 오그라들어있습니다.

오그라든 손으로 인해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선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회당 안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더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오그라들었던지 모릅니다.

 

밥 먹고 고작 하는 일이 예수님 뒤를 캐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사건건 챙겨가며 간섭하며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라."고 외치신 대상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손을 뻗어라.”라고 외치십니다.

왜 그리도 내면이 꼬이고 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다지도 이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저리가라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던지신 예수님의 외침이 바로 "손을 펴라."인 것입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 받았지만,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안식일에는 단죄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당신 계약의 표로 삼으시어, 제가 당신 자녀임을 드러내소서.
자비를 베푸는 저를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6.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

 

이런저런 묵상으로 두서없이 강론을 시작합니다.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다> 1920년생으로 올해 104세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 제목입니다. 제가 반세기전 1970년대 20대 청년기 대학시절 안병욱 교수와 쌍벽을 이뤘던 분으로 참 애독했던 글이 바로 이분의 글이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니 참 고상한 소망이요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에게 시인이 되라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오래전 ‘시인(詩人)’이란 자작시가 생각나네요.

 

“시인(詩人)이 

 어디 따로 있나요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

 끊임없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나

 시(詩)가 됩니다”-1998.5.4

 

다음은 김형석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의 요약입니다. 윤동주 시인과 동급생이었다 하니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지난 연말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 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독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 시인이다. 긴 세월이 지난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시를 쓰다 가고 싶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이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하다.”

 

제가 간혹 손님을 맞으면 정갈한(깨끗하고 깔끔한) 음식에 안내하는 수도원 부근의 “남도(南道)의 향(香)’ 음식점입니다. 이름도 시적(詩的)이다 싶었는데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남자 주인이 알고 보니 불자(佛者) 시인이었고 경이로웠습니다. 안에 보물을 숨기고 살아 온 분입니다. 음식점을 찾았던 수도형제가 전해준 시집을 보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이 쓴 ‘연꽃받침’이란 시입니다.

 

“불암산 자락 불암사

 수많은 외세

 불심으로 이겨내고

 처마밑 풍경울림 

 바람에 실려 구름타고 멀리멀리

 불자를 보듬어 주는

 보살들의 연꽃받침 속세를 밝게 비추리”

 

어제 면담성사를 본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승희(勝喜) 클라라’란 이름 뜻을 풀이하며 격려의 덕담과 더불어 드린 조언입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살라고 승희에 빛을 뜻하는 클라라 성녀 세례명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사세요. 이런저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개의치 마세요.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에 항구하세요.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마음도 순수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수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과 장소 마련이 필수입니다. 나름대로의 외딴곳, 오솔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문득 오래전 써놓은 ‘너 오솔길 있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너 

 밖에든 안에든 오솔길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임과 나만이 아는 오솔길

 임이 그리워 목마를 때 찾는 오솔길

 임과 함께 걷는 오솔길

 늘 걸어도 늘 그립고 아늑한 오솔길

 너 있는가?”-1998.7.28.

 

저에겐 수십년간 걷는 하늘과 불암산에 활짝 열려있는 배밭사이 오솔길, 하늘길입니다. 26년전 시를 이렇게 강론에 인용하니 참 놀랍고 신기하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늘 읽을 때 마다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 성구를 어제 낮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나 기뻤습니다. 

 

“오 내 하느님, 당신 뜻을 행하는 것이 내 기쁨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To your will, O my God, my delight,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마음마다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니 바로 참기쁨, 참행복은 주님의 법, 사랑의 법에 따른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길말고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뿐 참기쁨, 참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깨달아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며 날로 주님과 사랑과 신뢰를 깊이했던 주님의 절친(切親)인 성인들이요 주님의 절친이 되는 것은 제 간절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의 마음깊이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밖엔 답이 없다, 길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을 비교하는 것이 이해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자유로운 처신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저 자유로운 처신은, 안식일법을 상대화시키는 저 자유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할까요? 신기하고도 부럽지 않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이분들의 주님과 참으로 깊은 절친 관계에 있기에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 자존감 충일한 삶이기에 저리도 추호의 망서림이나 두려움, 불안이 없이 당당합니다. 그대로 주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확신할뿐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던 두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이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분별의 잣대임이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입증합니다. 예수님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요 예수님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법은 ‘사람이 먼저’라는 사랑의 법이요, 사랑의 법 자체인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분별의 요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자유, 참행복, 참 분별의 지혜도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안타깝고 아쉽지만 이점에서 실패한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사울입니다. 사무엘의 슬퍼하는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하느님께서 참 너무하시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리에게 참 좋은 경고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떠났고 이 또한 엄중한 현실입니다. 사울의 부주의와 불순종으로 자초한 불행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보살펴야 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즉각적인 회개와 실행입니다. 하루하루 연장되는 날은 주님과 사랑을 새로이 깊이하라 주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하고 있겠는지요? 이건 제가 참 많이 누누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1/17(수)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는 함께 살기 때문에 법과 규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규정은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법과 규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향해서 “손을 뻗어라.”라고 외치십니다.

왜 그리도 내면이 꼬이고 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다지도 이웃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저리가라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던지신 예수님의 외침이 바로 "손을 펴라."인 것입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안식일에는 단죄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당신 계약의 표로 삼으시어, 제가 당신 자녀임을 드러내소서.
자비를 베푸는 저를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 날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사세요. 이런저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개의치 마세요.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에 항구하세요.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마음도 순수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17(수)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389(제19)일 기도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내면이 꼬이고 꼬여...이웃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아...

트집잡고 시비걸고 야유하고 비난하는 말들에...

마음이 오그라들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외침 "손을 펴라"를 떠올리게 하소서.

 

바다의 파도와 같은 감정에 개의치 않게 하소서.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을 항구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기쁜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 2024년 1월17일(수) 11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