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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19일 금요일[(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19일 금요일[(녹) 연중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4,3-21
그 무렵 3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서 가려 뽑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과 그 부하들을 찾아 ‘들염소 바위’ 쪽으로 갔다.
4 그는 길 옆으로 양 우리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사울은 거기에 들어가서 뒤를 보았다.
그때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 굴속 깊숙한 곳에 앉아 있었다.
5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다윗은 일어나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랐다.
6 그러고 나자,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자른 탓에 마음이 찔렸다.
7 다윗이 부하들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
8 다윗은 이런 말로 부하들을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울은 굴에서 나와 제 길을 갔다.
9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와 사울 뒤에다 대고,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하고 불렀다.
사울이 돌아다보자, 다윗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였다.
10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11 바로 오늘 임금님 눈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12 아버님, 잘 보십시오. 여기 제 손에 아버님의 겉옷 자락이 있습니다.
저는 겉옷 자락만 자르고 임금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임금님을 해치거나 배반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고 살펴 주십시오. 제가 임금님께 죄짓지 않았는데도,
임금님께서는 제 목숨을 빼앗으려고 찾아다니십니다.
13 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4 ‘악인들에게서 악이 나온다.’는 옛사람들의 속담도 있으니,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15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죽은 개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벼룩 한 마리입니까?
16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17 다윗이 사울에게 이런 사연들을 다 말하고 나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게 정말 네 목소리냐?”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다.
18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19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20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준 것을
주님께서 너에게 후하게 갚아 주시기를 바란다.
21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7(56),2.3-4.6과 11(◎ 2ㄱ)
◎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제 영혼이 당신께 숨나이다. 재앙이 지나갈 그때까지, 당신 날개 그늘로 피신하나이다. ◎
○ 하느님께, 지극히 높으신 분께, 나를 위하시는 하느님께 부르짖네. 하늘에서 나에게 구원을 보내시어, 나를 짓밟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리라. 하느님은 자애와 진실을 보내시리라. ◎
○ 하느님, 하늘 높이 오르소서. 당신 영광을 온 땅 위에 드러내소서. 당신의 자애 크시어 하늘에 이르고, 당신의 진실 크시어 구름에 닿나이다.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신부님 묵상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열둘을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같이 출발했는데 어떤 이들은 진전이 있고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를까요? 당연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기하다 넘어지는 사람처럼 목적 없이 달리다가는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에 ‘40년째 운동하는 80세 할머니’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먹는 혈압약이나 당뇨약, 고지혈약, 골다공증약 등의 성인병 약은 입에도 안 대는 것은 물론 “감기, 몸살 한번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걷기 힘든 증상을 느꼈고 병원에 갔더니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근육이 감소해서 그러니까 근력 운동을 좀 하세요.”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근력 운동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한 달을 하니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이 절실함이 보디빌딩 대회에서 시니어 부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헬스클럽 관장님이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도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니 일흔다섯에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비키니를 입는 것도 창피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려고 마음먹고는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식당 알바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만약 이 할머니 보디빌더를 그분의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 것입니다. 당신들이 준 몸을 끝까지 잘 가꾸고 누구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혼다 자동차 주식회사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동차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와 혁신, 끊임없는 비전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회복력과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역경에 맞서 혼다를 존경 받고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오르지 않고 타인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소명 의식이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별히 나의 삶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입니다. 
    신학생 때 같은 반 학생에 저에게 “형, 다른 사람들은 쓰러지는데 형만 혼자 1등으로 도달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다른 친구들하고 왜 함께 오지 않았니?’라고 하지 않으실까?”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올라야 나를 보고 다른 이들도 오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빠르게 오르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아랫부분에서 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도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보 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영성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사명입니다. 무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주신 분께 대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금요일

필라델피아에서 올라온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청년들의 세례명은 알베르토, 가브리엘, 미카엘, 루시아, 레지나입니다. 모두들 성당에서 함께 지냈고, 청년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지내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사자성어는 잘 몰랐습니다. 저는 올해가 용의 해이기에 화룡점정, 용두사미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끝으로 새해의 덕담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짧은 저의 식견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의 지평을 더욱 넓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은 용맹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 용맹함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해치려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오늘 지금 여기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을 삽시다-

 

여러 단상들로 오늘의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의 식사는 대부분 침묵중에 말씀을 들으며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거룩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깁니다. 수도규칙 독서중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다음 구절입니다.

 

“모든 이는 모든 일에 있어 규칙을 스승처럼 따를 것이며, 아무도 이것을 경솔하게 위반하지 말 것이다. 아무도 수도원 안에서 사사로운 마음의 뜻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성규3,7-8)

 

규칙을 스승처럼 따르라는 말씀이 참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사랑의 규칙이요 규칙중의 규칙이, 영원히 살아 있는 규칙이, 우리 모두의 중심이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규칙의 준수를 통해 사랑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두 성인의 말씀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현재의 교회는 미래의 교회가 생겨나기 전까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 것이며, 의로운 이들은 그 안에서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교회는 영원한 본향을 늘 목말라하며 절제된 삶을 살아갔으며, 마음을 흩어놓는 온갖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내밀하게 하느님의 법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여 우리도 우리의 집을 떠나, 다시 말해 세상의 관심사들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천막에 살아야 합니다.”-존자 베다

 

일상의 내 삶의 꽃자리에서 평범한 성인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날로 거칠고 험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성인의 삶입니다. 2024년 2월호 생활성서의 특집은 “옆집의 성인들”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을 거룩하게 여기며 이웃의 아픔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우리 가까이 살고 있는 옆집 성인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몇해 전 누구나 옆집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교황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 행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성화되십시오.”

“성인이 되십시오.”

 

성인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성인이 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요 지혜로운 대책이 될 것입니다. 성인중의 성인이, 성인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예수님입니다. 어제 미사시 입당성가 61장도 새로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어제 오랜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공식 집무를 시작한 어느 정치인의 환한 얼굴로 수없이 고백했던 “새롭다”란 소박한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인들의 삶이라면 날로 새로워져 늘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즐겨 늘 자주 고백하는 고백기도중 일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중 우리가 모시는 분과 똑같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혼신을 다한 사목현장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군중이 호숫가 예수님께 모여드니 새삼 세상 모두의 중심이 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이 부재한 인류요 세상이라면 그 어둠은 얼마나 짙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길을 잃어, 

방향을 잃어, 

목표를 잃어,

빛을 잃어, 

희망을 잃어, 

중심을 잃어, 

진리를 잃어, 

생명을 잃어 

 

무지와 죄악의 어둠중에 병들어 망가지고 무너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똑같은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길을 찾는, 방향을 찾는, 목표를 찾는, 희망을 찾는, 중심을 찾는, 진리를 찾는, 빛을 찾는 영혼의 근본적 욕구요, 이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실 분은 단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그분을 만나 치유를 받았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만 보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달아납니다. 인기의 절정에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지극히 경계하십니다. 적대자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 때문이며, 군중들이 미몽에서 깨어나 참된 메시아이신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는 메시아가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을 신신당부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고백이 진짜가 아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입증됩니다. 감동적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마르16,39)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감동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고군분투하는 다윗의 삶도 인상적입니다. 충천하는 인기와 더불어 사울의 정적으로 부각되니 그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흡사 복음의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사울은 강력한 라이벌로 부각한 다윗에게 쫓기는 기분이었을 것이며 그의 시기와 질투도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최선을 다한 다윗 곁에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사울의 아들 요나단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길이 회자되는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적대자들의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중에도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과 다윗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평생 고난과 시련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아가신 두분 예수님과 다윗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 삶의 귀감이 됩니다. 온실속의 화초같은 삶을, 평탄한 꽃길같은 삶을 살았던 성인은 결코 없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다시 한 번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고 거칠고 험한 광야(廣野) 지상 삶중에도 주님과 함께 천국(天國)을 사시기 바랍니다.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 마지막 두연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여기 주님의 집 교회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가정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형제들과 더불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1/19(금)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전삼용 신부)
 
2.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는 메시아가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을 신신당부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고백이 진짜가 아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입증됩니다. 감동적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마르16,39)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이수철 신부)

 

 

1/19(금)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제391(제21)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하게 하소서.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소서.

 

- 2024년 1월19일(금) 12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