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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1일 주일[(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1일 주일[(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며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말씀과 은총을 가득히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 회개하고 온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오직 한 분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멀리하는 이들에게, 온 삶으로 그분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대영광송>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5.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5(24),4-5ㄱㄴ.6과 7ㄴㄷ.8-9(◎ 4ㄱ)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소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제2독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르 1,15
◎ 알렐루야.
○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알렐루야.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20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이신 주님, 하느님의 말씀 주일을 맞은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성경 말씀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지혜이신 주님, 이 땅의 정치인들을 굽어살피시어, 자신의 경험이나 신념에 치우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의 일에 마음을 모으고 약속들은 반드시 지키게 하소서.

3. 노숙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추운 날씨에 한뎃잠을 자는 노숙인들을 살펴 주시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말 못 할 사연들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도자이신 주님, 니네베 성읍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뉘우쳐 재앙을 피하였듯이, 저희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1 : 파스카 신비와 하느님 백성>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선택된 겨레, 임금의 사제단,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고
저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권능을
온 세상에 전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파스카의 신비로 이루어진 주님의 위대한 업적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악한 길을 걷고 있다면 하루빨리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주일)

 

뉴욕에서 한국영화 서울의 봄을 보았습니다. 자막은 영어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보았는데 미국에서 한국영화를 영어자막으로 보니 조금은 생소했습니다. 한국영화 노량도 곧 개봉한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도, 노량도 역사적인 사건에 재미를 더한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은 45년 전의 사건이고, 노량은 426년 전의 사건입니다. 서울의 봄에 저는 서울에 있었지만 노량해전은 제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봄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과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권력을 얻으려고 군대를 동원한 사람들이 승리했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얻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부당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군인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애국심은 이렇게 영화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생 갈 것 같았던 권력도 10년이 못 되어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백담사로 유배를 가야 했고, 내란 음모죄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서울의 봄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몰입감이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권위에 놀랐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해졌고, 중풍병자는 일어나 걸었고, 눈먼 소경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치유되었고, 죄인들은 용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자비를 베풀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쉽게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봄은 오지 않았음을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앨 음모를 꾸몄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끝났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삼일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소문이 돌았습니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군인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풀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두려움에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이제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페소, 고린토, 갈라디아로 봄은 퍼져나갔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도 봄이 시작되었고, 240년 전에 조선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2. 2024년 01월 21일 일요일

[연중 제3주일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교리 교육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 영원히 십자가의 길을 하는 곳이고영원히 미사를 드리는 곳이에요.

영원히 하느님 말씀을 듣는 곳이고영원히 교리를 배우는 곳이에요.”

그러자 한 아이가 아이고.” 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였더니,

아이들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제가 아이들에게 예로 들었던십자가의 길미사하느님 말씀교리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이미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신앙의 분명한 목적의식도 잃어버린 신앙인들이 많습니다.(말씀을 모르니까)

그저 교우들과 만남에서 얻어지는 기쁨만을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적으로 느끼며 미사에 나옵니다.(행위의 신앙생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 이유도 잃어버리고미사와 복음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기쁨도 느끼지 못하며,

하느님을 믿고 있다.”라고 말하는 교우도 많습니다.(행위의 신앙생활)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세상은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삶의 모든 습관에서 떠나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하는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선포한 요나 예언자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선택을 한 것처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회개의 삶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신앙생활은 복음을 믿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들의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예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당신을 꼭 붙잡고 반박하였”(마르 8,32)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일 뿐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갓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히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조정에 승복하여 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20.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ㄴ)

 

미치지 않고 살 수 없는 희망도 길도 보이지 않는 참 재미없는 어둡고 험한 광야같은 세상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하는데 중독등 잘못 미쳐 폐인이 괴물이 되니 문제입니다. 기상하면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19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하면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입니다만 정신력으로하면 60세라 합니다. 교황님의 어제 하루 일과도 정말 가득찬 하루였습니다. 개인이든 일행이든 만날 때 마다 꼭 메시지나 말씀이 뒤따르는데 어제 하루만도 네 번의 접견이 있었습니다.

 

1.일치주간을 맞아 핀란드의 교회일치그룹들(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을 만나 “순례자 교회(a pilgrim Church)”로서 더불어 여정중인 이들에게 “성인들은 일치의 원천”임을 역설했습니다.

2.수백명의 가톨릭대학 당국자들을 만나 “계속하여 지혜와 인간성을 함양할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3.1963년 댐의 붕괴로 2000명 가량이 죽었던 이태리 북부 교구내 신자들 백여명의 방문객들에게는 “여러분은 부활을 증거해왔다”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4.카차흐스탄 대통령과의 만남.

5.콜롬비아 대통령과의 만남.

교황님의 하루 일상이 너무 경이로워 구체적으로 출력하여 열거해 봤고 후에 내용들은 읽을 계획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자주 언급한 말이 생각납니다. 교황님이야말로 불경스럽긴 하지만 제대로 미친 살아 있는 성인임이 분명합니다. 89세 고령의 나이에 미치지 않으면 이렇게 한결같은 열정으로 사시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아마도 매일미사 복음중 가장 짧을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 집중한 강론 주제도 언제나 대동소이합니다. 앞절은 얼마나 분주한 예수님의 일상인지 군중이 계속 모여들어 예수님 일행은 음식을 들 수 조차 없었다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려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행태는 정상인들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이라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저역시 한밤중 12시 넘어 기상하여 강론을 쓰는 지금은 01:40분 정상인들의 생각에는 미친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보니 거의 날마다 미쳐서 쓰는 강론이네요. 예전 약 50년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온 열정을 다 쏟을 때 선배교사의 충고(?)에 드린 답변도 생각이 납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쉽게 살수 없어.”

“저에겐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생활인데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저의 사랑 전부였다면 20대 후반의 청년교사시절의 저에겐 아이들이 저의 사랑 전부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에 미친 삶이지요. 이래서 저는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칠 광자가 들어가는 말마디들, 광기狂氣, 광증狂症, 광분狂奔, 광신狂信, 광폭狂暴등 많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기위해선 정말 영적훈련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미쳐사는 것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필수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달인이나 장인, 대가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일 것입니다. 제대로 미친 경우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 사는 수도자들도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미쳐야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참 거칠고 험한 생존경쟁 치열한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여정 세상살이에 제대로 미친 사람들보다 잘못 미쳐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강조하는 바 세 유형의 인간 군상들입니다. 제대로 미친 성인들의 온전한 사람들과 희망을 잃고 온갖 중독으로 폐인이나 괴물이 된 사람들 셋으로 분류해보곤 합니다. 

 

요즘 스마트톤중독 환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다들 알게모르게 이런저런 중독으로 미쳐가는 폐인이,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광신이, 맹신이 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앞으로 1인가구의 증가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 아득한 예전 사막교부 성 안토니오 압바의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에 대한 예언같아 섬찟한 느낌도 듭니다.

 

-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사람들이 미쳐갈 때가 오고 있다. 그때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어떤이를 볼 때 그들은 그를 공격하며 말할 것이다. “너는 미쳤다.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

 

문득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 “벌거벗은 임금님”(사치와 허영에만 들떠 사는 사람들의 허망한 삶을 꼬집는 재밌는 안델센의 동화) 예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 미친 인간 현실을 빗대 예화들입니다. 정말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생각되는 세상이라면 이것은 미쳐가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새삼 온전한 인간으로 깨어 살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어제에 계속 이어지는 오늘 제1독서 다윗의 일화가 감동적입니다. 오늘부터는 사무엘 하권의 시작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에 슬퍼하는 다윗의 모습이 참 인간적이다 싶습니다.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애가가, 조가가 심금을 울립니다.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세었지...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이런 극한의 슬픔속에서도 다윗이 내적으로 무너지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음은 그의 깊은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삶 덕분이요 요나탄과의 깊은 우정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울 아버지에게는 효자였고, 다윗에게는 친구였으니 요나탄은 주님의 훌륭한 전사임은 물론 참된 인간의 전형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늘 되뇌이는 말도 생각이 나네요. 

 

‘본의 아니게 치매나 노환으로 품위를 상실하고 요양원에서 세상 떠나는 노년인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전사로서 객사가 사고사가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죽어야 전사다, 일하다가 기도하다가 공부하다가 즉 영적전투중에 살다가 전사했으면 소원이겠다.’

 

주님의 전사답게 살다가 은총으로 깨끗한 전사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평상시 영혼 건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제의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적 주식과도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 공동전례기도의 규칙적 평생 수행이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얼마나 고마운지 어제는 수도형제들과 힘차게 시편을 노래하면서 통감했습니다.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이요 참으로 건강한 욕구입니다. 가톨릭교회야 말로 진정 힐링의 종교요 힐링의 센터요, 온갖 중독의 해독에, 영혼 치유와 건강에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노래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음을 어제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최고의 법이요 희망이자 사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를 실현시켜주는 전례은총이 참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되시면, 176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시편 119장(주님의 법)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풍요롭고 좋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정의요 말씀이요 계명이요 하느님의 법으로 계시됩니다. 온전한 치유에 건강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뿐입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1인가구 시대에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가톨릭의 공동전례기도를 찾을 거란 예감도 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가톨릭교회의 미사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우리 모두 영적 건강의 온전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6). 아멘.


1/21(일)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들 마음에도 봄이 오면 좋겠습니다.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봄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마음의 봄에는 꽃이 핍니다.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찾는다면 내 마음은 언제나 화사한 봄이 될 것입니다. 이천 년 전 그날처럼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조재형 신부)

 

2.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회개의 삶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신앙생활은 복음을 믿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김재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히게 하소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조정에 승복하여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막교부 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사람들이 미쳐갈 때가 오고 있다. 그때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어떤이를 볼 때 그들은 그를 공격하며 말할 것이다. “너는 미쳤다.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

 

문득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 “벌거벗은 임금님”(사치와 허영에만 들떠 사는 사람들의 허망한 삶을 꼬집는 재밌는 안델센의 동화) 예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 미친 인간 현실을 빗대 예화들입니다. 정말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생각되는 세상이라면 이것은 미쳐가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새삼 온전한 인간으로 깨어 살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이수철 신부)

 

1/21(일)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393(제23)일 기도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생각되는 세상이라면 이것은 미쳐가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깨어 살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늘상 화개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게 하소서.

 

- 2024년 1월21일(일) 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