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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월 20일 토요일[(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월 20일 토요일[(녹) 연중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또는
[홍] 성 세바스티아노 순교자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 쓰러졌는가?>
▥ 사무엘기 하권의 시작입니다.1,1-4.11-12.19.23-27
그 무렵 1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
2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3 다윗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23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25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26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27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0(79),2-3.5-7(◎ 4ㄴ 참조)
◎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 이스라엘의 목자시여, 귀를 기울이소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이끄시는 분,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분, 광채와 함께 나타나소서, 에프라임과 벤야민과 므나쎄 앞으로! 당신 권능을 떨치시어, 저희를 도우러 오소서. ◎
○ 주 만군의 하느님, 당신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렵니까? 당신은 저희에게 눈물의 빵을 먹이시고, 싫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당신이 저희를 이웃의 싸움거리로 만드시어, 원수들이 저희를 비웃나이다. ◎

복음 환호송

사도 16,1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0-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영상을 통해서 가슴이 찡한 추도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다 숨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해서 오열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슬픈 영결식에서 바람에 날리던 노란리본을 보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셨을 때입니다. 추운 겨울임에도 조문행렬이 명동 주변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발차취가 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있습니다. 피지 못한 꽃이 바람에 떨어지듯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삶을 살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야 하는 부모와 아내의 슬픔이 그렇습니다. 벌써 4년 전입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가 제 대신에 문상을 받았고, 장지까지 함께 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시고 교구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장례미사 잘 했으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 10월 저는 아버지와 함께 모셔진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부모님이 있는 추모관에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오늘 다윗은 사랑하는 친구 요나탄과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위령미사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되고, 죽은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신앙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올 영원한 생명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4년 나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마르코 3,20-21

 

삶이 행복하여지려면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 말씀은 매우 짧습니다. 짧지만 아주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죠.

예수님을 좋아하는 군중들과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쳤다고 여기는 예수님의 친척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도 그 영향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하시는 것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나의 선택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좋은 면을 더 많이 보면 됩니다.

어쩌면 이 과정이 묵상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 씩 받기로 약속하고 착한 포도밭 주인에 의해 고용된 일꾼들은

내가 일한 시간보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더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일과 주인이 감사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우리 뇌는 잘 속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아주 신 레몬 반을 잘라서 한 입을 딱 깨물어서

레몬즙이 여러분의 입에 가득히 차는 그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가 직접 지금 레몬을 먹은 게 아닌데, 상상만 했는데도 뇌는 진짜 먹는 건 줄 알고

침이 나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상상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의 좋은 이미지가 쌓이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가 쌓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안 좋은 생각으로

자꾸 씌워서 그렇지, 뇌를 속여서 그런 사건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담 프로스트의 비밀 정원’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어요. 아기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기억과

두 분이 돌아가신 기억으로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두 이모의 집에서 피아노를 쳐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옆집에 마담 프로스트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분이 약간은 좀 마술적인 행위를 합니다.

약을 타서 어렸을 때의 음악을 들려주면 그때의 기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처음은 엄마가 아빠에게 폭행당하는 기억이 있었지만, 사실 두 분은 레슬링으로

돈을 버는 분들이었습니다. 집에서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두 분은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사고로 한 번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기억은 어쩌면 우리가 조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

‘기억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잊기 위해 자기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속이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면 그것을 좋은 목적으로 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의 삶이 너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싫었는데 감사 일기를 쓰다가 보면 보니까,

삶에 감사한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보는 시각이 바뀐 것이고 하루하루 ‘오늘은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의 기대감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위해 담배에 안 좋은 이미지를 덮어씌웠습니다.

담배 때문에 군대에서 고생한 생각, 담배를 피우며 멋지게 보이려다 기침해서 창피당한 기억들.

담배를 굳이 피워서 그런 기억을 되새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담배를 안 피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는 우리 선택입니다.

틱 장애 아이 엄마의 감사 일기: “아이의 틱이 시작된 후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뭐가 힘들었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아이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들어주려고 하게 되니 감사합니다.”

 

감사 일기를 안 썼으면 아이가 틱이 생긴 순간은 인생에서 아주 짜증 나고 화가 나는

순간이 됩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에서 아이들은 한 달간 부모님을 칭찬하라는

숙제를 받습니다. 그렇게 하니 집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그분의 무엇을 더 기억해야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나를 위해 하신 희생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그만큼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기억은 바뀔 수 있습니다.

아니 바꿀 수 있습니다. 좋은 많은 면 중에 안 좋은 것 하나만 가지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분의 친척들처럼 되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읍시다.

그러면 좋은 면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5)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성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부름, 따름, 섬김, 배움, 닮음-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어제 목요일 저녁미사는 왜관수도원의 주세환 프란치스코 새 수도사제가 주례했습니다. 저와 똑같은 수도명 프란치스코입니다. 문득 35년전(1989년 7월11일) 사제서품식 미사때 만감이 교차했던 감동스런 입당성가 445장이 생각났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 모두가 너나할 것없이 주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따름의 여정”은 동시에 날로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도반 형제들과의 더불어 성화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제자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목적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제자들이자 사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단 사도들뿐 아니라 세례성사로 불림받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신원이 안으로는 주님과 함께 지내는 “제자”요,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라는 하나이자 둘인 이중신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둘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우선했고 우리는 그 부르심의 성소에 응답한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셨으니 우리는 몰라도 나름대로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의 부르심은 은총의 선물이자 신비라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함께 하며 따르기에 가능한 공동생활임을 깨닫습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라 했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평생 성화의 여정입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날마다 부름-따름-섬김-배움-닮음의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기에 저는 믿는 이들의 신원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이자 주님의 전사라 칭하곤 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 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입니까?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우리 내면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참 소중한 내 얼굴이자 이웃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침, 저녁 거울에 비춰보는 내 얼굴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인지 주님의 거울에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평생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얼굴이듯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내면의 얼굴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하루하루 끊임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려는 분투의 노력이 우리 삶에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력히 권하는바 각자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하기입니다. 믿는 이들 하나하나의 인생이 미완의 성경책입니다. 하루1쪽씩 써내려가는 내 삶의 성경책, 나이 곱하기 365일 하면 내 삶의 쪽수가 나올 것이고 마침내 죽는 날, 이 내 삶의 성경책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주 틈나는대로 신구약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고 있는 삶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성화의 여정중입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한 현시점을 살펴보는 것이요 주님의 거울에 나의 내면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얼굴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날마다 평생 바라보는 똑같은 얼굴인데 사진으로보면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가 놀랍니다.

 

2009년 심은 애목들인 수도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는데 하루하루 볼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이렇게 거목이 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이며 주님은 한눈에 당신을 닮았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사울과 다윗의 일종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연속입니다. 둘 다 주님께 불림받은 거룩한 사람들인데 사울은 성소에 불충함으로 이미 하느님께 내침받은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충실해야 하는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필수적인 요소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늘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은 성소에 큰 위기를 겪습니다만 분별력의 지혜로 그 큰 유혹을 벗어납니다. 다윗을 쫓다가 다윗 일행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뒤를 보는 사울을 발견한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성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유혹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다윗이 뒤를 보던 사울을 비겁하게 죽였더라면 다윗의 성소 역시 위태했을 것이니 하느님께서도 다윗을 내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만약?”은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믿는 이들을 나름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저의 경우만 해도 다시 산대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맡기고 하루하루 날마다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여 부름, 따름, 섬김, 배움의 삶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삶은 선택이요 행복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마지막날 주님께 봉헌할 “이야기(story;스토리)”와 “내용(contents;컨텐츠)” 풍부한 아름답고 거룩한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역시 다윗은 판단은 지혜로웠고 그의 인품은 참 멋지고 관대하고 훌륭했습니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다윗은 부하를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은받은이가 아니시냐?”

 

새삼 성소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웃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주며 그들의 성소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각자 고유의 성소이기에 자칫하면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건방지고 교만한 어리석은 무지의 행위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지혜롭고 관대한 처사가 사울을 회개하게 했고, 그 감동적인 내용은 제1독서 후반을 아름답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은 다윗의 영적 승리요 주님의 신뢰와 더불어 그의 성소도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형제 도반들과 더불어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정성을 다해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은 나의 힘.

 그분께서는 내 발을 사슴같게 하시어

 내가 높은 곳을 치닫게 하시나이다."(하바3,19). 아멘.


1/20(토)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올 영원한 생명으로 위로를 받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의 삶이 너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싫었는데 감사 일기를 쓰다가 보면 보니까,

삶에 감사한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보는 시각이 바뀐 것이고 하루하루 ‘오늘은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의 기대감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다윗은 부하를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은받은이가 아니시냐?”

 

새삼 성소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웃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주며 그들의 성소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각자 고유의 성소이기에 자칫하면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건방지고 교만한 어리석은 무지의 행위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지혜롭고 관대한 처사가 사울을 회개하게 했고, 그 감동적인 내용은 제1독서 후반을 아름답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은 다윗의 영적 승리요 주님의 신뢰와 더불어 그의 성소도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이수철 신부)


 

1/20(토)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392(제22)일 기도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 - 2024년 1월19일(금) 23시...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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